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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 선생의 인간관 - 이기상 교수

에코맨21 2020. 3. 30. 09:39

“자리 없는 사이.”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다석의 인간관


1. 21세기 영성의 시대를 예비하며

 

흔히 철학은 시대정신을 개념으로 잡는다고 말해진다. 인류사적으로 문제가 가장 많았던 20세기의 시대정신을 고뇌하며 개념으로 잡으려 시도한 서양 철학자들은 많다. 그렇다면 20세기 격동의 한가운데 살았던 한국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잡으려고 버둥거렸으며 무엇이라 파악해 냈는가? 세계사적인 문제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그 모든 문제들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한국인이 고민하며 주체적으로 사유하여 붙잡은 시대정신이란 것이 과연 있기는 한가?


함석헌은 생전에 이렇게 한탄했다.
“한국 사람은 심각성이 부족하다. 들이파지 못한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는 말이다. 깊은 사색이 없다. 현상 뒤에 실재를 붙잡으려고, 무상(無常) 밑에 영원을 찾으려고 잡다(雜多) 사이에 하나인 뜻을 얻으려고 들이파는, 캄캄한 깊음의 혼돈을 타고 앉은 알을 품는 암탉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운동하는, 생각하는 얼이 모자란다. 그래 시(詩) 없는 민족이요, 철학 없는 국민이요, 종교 없는 민중이다. 이것이 큰 잘못이다.”


아니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있다, 있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시대 아픔을 개념으로 붙잡아 풀어보려고 노력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유영모이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위대한 사상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의 문제의식이 그 사람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너무나 높은 데서 너무나 멀리 보고 있기 때문에 먹을 것 찾기에만 급급해 시장바닥만 뒤지던 우리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20세기 서양의 물질문명이 휘몰아가고 있는 지구파괴와 인간성 말살의 위험을 경고한 서양 철학자들은 많다. 그중 한 사람인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성중심, 존재자중심, 인간중심의 삶과 사유의 방식이 퍼뜨리고 있는, 지구적 아니 우주적 지배의 논리와 그 폐해를 간파하고 새로운 사유에 의한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생활세계에서 쫓아낸 <성스러움>의 차원을 되찾아 와야 한다고 말하며, 그것을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표현하였다. 서구의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몰아낸 다양한 형태의 무(無)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맺음과 경험만이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을 열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외에도 서양의 많은 지성인들은 21세기가 새로운 영성, 새로운 종교성, 새로운 정신성의 시대가 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제까지는 ‘있는 것’[존재자]과 인간은 이성(理性)으로 관계 맺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없는 것’[무, 공, 허]과는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영성>으로써이다. 이미 서양에서도 오래 전에 신비주의자들은 그러한 영성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영성가인 다석 유영모에 의하면 영성은 우리말로 ‘얼’이다. 우리 자신이 ‘얼’[얼나]이기에 우리는 ‘얼’[한얼, 성령]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다석은 하느님이 거룩한 이유에 대해서도 하느님은 사물과 인간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없이 계심’의 방식으로 있기에 ‘거룩하다’고 이야기한다. 동양과 한국에서는 눈앞의 자명한 있음보다도 오히려 이러한 불명확한 <없이 있음>을 더 중시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하늘[天]로 표현되었고, 그리고 그것이 거룩함으로 공경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거룩함과의 관계맺음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21세기 영성의 시대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며 인류에게 희망은 없을 것이다. 21세기 이 땅의 지성인들이 해야 할 과제는 바로 우리들의 삶의 문법에 녹아있는 고유한 한국적인 영성을 찾는 일이다. 

 

2. 셈 생각과 뜻 생각

 

존재와 이성이라는 짝지음의 구도에서 벗어나 무․공․허와 그 대칭을 찾을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영성이다. 이성의 중요 기능인 생각에는 ‘되는[드는]’ 생각과 ‘하는’ 생각 그리고 ‘나는’ 생각이 있다. 서양 사람들은 계산 가능한 것만을 주로 본다. 그렇지만 생각에는 ‘셈 생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뜻 생각’도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사유능력에는 셈하는 사유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읽어낼 줄 아는 사유능력도 있다고 하였다. 셈하는 셈 생각, 즉 측량, 계산이 서양에서는 발달하였다. 그것이 과학과 기술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생각에는 뜻을 새기는 능력도 있다. 뜻을 보고 뜻을 읽어내는 생각 말이다. 뜻을 볼 줄 아는 나는 ‘뜻나’이다. 이런 다석의 사상을 받아 들여 함석헌은 『뜻으로 보는 한국역사』를 저술했다.


뜻은 계속 끊임없이 존재의 돔을 씌우는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서양철학의 시작에 철학자들은 존재의 지평을 ‘이데아’라고 이름하였다. 그것이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실체, 주체, 정신, 의지, 힘에의 의지 등으로 계속 바뀌어왔다. 우리에게도 그런 존재의 돔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천(天), 도(道), 리(理), 기(氣), 성(性), 심(心) 등으로 이름하였다. 우리 문화와 전통에도 나름의 존재의 돔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이러한 존재의 돔을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터이다.


동양과 서양이 교류가 없었을 때는 우리 나름의 존재의 돔을 형성해가면서 형성되어 온 다양한 돔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그 중 하나를 택해 뜻을 새겨 넣는 방식으로 우리끼리 우리의 존재의 돔을 계속 수리 보완하는 수준에서 살아왔다. 세계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 바로 이 존재의 뜻이다. 인간의 삶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의 뜻이다. 그것을 우리는 눈으로 볼 수도, 수로 셈해낼 수도 없다.


우리의 육체적인 눈은 존재의 뜻에 의해 얼기설기 짜여진 의미의 그물망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눈은 서양화된 존재의 뜻으로 짜여져 버렸다. 동․서양이 만나지 않았을 때는 각자 따로 다른 존재의미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서양이 과학과 기술을 앞세우고 동양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을 때, 우리의 존재의 돔인 천(天), 도(道), 리(理), 기(氣), 성(性), 심(心) 등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현대는 서양의 존재의 그물망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100년 전 우리들의 삶과 현재 우리의 삶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그 엄청난 존재시각의 차이에 놀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명성황후의 두 번째 왕자는 항문이 없이 태어났다. 서양인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작은 이상(異狀)이다. 수술로 항문을 만들어주어 간단하게 손을 볼 수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서양 의사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들을 불러들여 수술만 시키면 왕자의 목숨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우리 존재의 눈으로는 왕이 될 사람에게 칼을 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 아기는 며칠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존재의 눈이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셈이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누가 그런 병 때문에 자기 아기를 죽도록 내버려두겠는가? 그런 부모가 있다면 아마도 형사처벌 감일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우리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존재의 시각도 시대가 달라지며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뜻 생각이 어떤 시대에 어떠한 패러다임으로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사유[생각]에는 이처럼 두 가지가 있다.


함석헌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는 ‘하는’ 생각의 단계에 만족해서 거기에만 머물지 말고 ‘나는’ 생각의 단계에로 올라가야 한다. 다석의 표현대로라면 ‘뜻나’에서 ‘얼나’로 넘어가야 한다. 있음의 의미를 읽어 낼 줄 알면 없는 것도 볼 수 있게 된다. 서양의 역사는 있는 것의 범위에 들 수 없는 것을 무(無)로 간주하여 없애온 ‘무 제거의 역사’였다. 그런데 20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없다고 간주되었던 것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무의 반란, 즉 인간이 없다고 여기던 것, 무․공․허가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인간이 필요 없다고 내다버린 가장 큰 것 중 하나로 신, 성스러움, 영적인 것이 있다.


그러기에 하이데거는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우리가 필요 없다고 제거해버린 그 신이 다시 도래할 수 있게끔 신을 위한 마당을 마련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뜻이다. 신이 도래할 수 있는 그 마당이 바로 성스러움이며 영성적인 것이다. 성스러움, 거룩함(das Heilige)이라는 독일어에는 ‘온전함, 온통(깨지지 않는 전체)’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것은 이성으로는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이며 신비스러운 것으로서 비밀 중의 비밀이다. 그것은 알갱이며 심연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심연을 알기 위해 심연을 파헤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심연이 아니다. 마치 우리가 산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산을 모두 파헤쳐 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산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기에 우리는 산을 그대로 둔 채 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셈 생각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또는 언어, 이성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하여 없는 것이라고 간주할 때 그것은 자연히 우리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무․공․허를 멀리 치워버렸다. 그것을 알아보고 경험하던 우리의 능력을 떼어내 버렸다. 21세기 영성의 시대에는 우리가 몰아낸 무․공․허에 대한 경험을 되살려내야 한다.


서양 사람들은 있는 것(존재)에 대한 놀라움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없는 것에 대한 경외심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있는 것을 있게끔 하는 없는 것, 텅 빈 것, 빈탕 한데,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운 것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말로 표현한다면 이미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이 본래 그것인바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신은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경우 신은 더 이상 본래의 신이 아니다. 우리는 말에 진리를 담으려 노력하지만, 진리를 말속에 담았다고 주장한다면 이때의 진리는 더 이상 참진리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정신이 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은 말해진 것만 믿는다. 우리는 너무 말을 하지 않아서 문제다. 이제 우리도 서양 사람들에게 배워 말을 하기 시작하지만 그 말의 한계를 잘 알기에 말하기를 매우 주저한다. 말하는 것만 믿는 서양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그들은 그 손가락만 쳐다본다. 손가락만 보는 그들에게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그리로 눈을 돌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설득력과 끈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마당에서 그들의 놀이, 게임, 방법, 규칙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말로 진리를 전부 배울 수는 없지만 진리를 말로 표현하려고도 노력해야 하며,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리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1세기 인류는 기술과 과학이라는 최첨단 열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낭떠러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다. 빨리 그 방향을 돌려놓지 않으면 인류는 물론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3. 인간은 사이-존재 [사이에-있음]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나름대로 대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보도록 하자. 우리는 먼저 인간에 대한 그림까지도 새롭게 그려야 한다. 즉 서구에서는 인간을 동물은 동물이되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식으로 그려내었고 그것이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인간상이 필요하니 그것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우리는 ‘사이 존재’, ‘사이에 있음’이라는 우리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말의 말놀이에 유의하여 인간, 시간, 공간, 천지간(天地間)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은 ‘세계-안에-있음’이라 명명되는데, 이는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 안에 던져져 있으면서 동시에 또한 거기에서부터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존재자라는 의미이다. 하이데거의 인간 해석에서의 독특한 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이데거 이전에는 세계를 확실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이 확실한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여, 우선 확실하게 있는 이 ‘나’가 세계를 만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식이었다. 이러한 근대적 사유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나 이외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이다. 즉 나는 확실한데 세계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 곧 나와 세계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근세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오히려 반대로, 확실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나’는 가장 가까운 듯하면서 실은 가장 먼 것이다. 반대로 세계는 가장 먼 듯하면서 사실은 가장 가까운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안에-있음>이라 규정하면서 인간에게 세계는 전제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인간은 자신을 세계 안에 던져져 있는 것으로 발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인간은 세계 안에 던져져 있으면서 그 세계 안에서 ‘남들’이 사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 과제는 ‘나’는 누구인지, 나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글쓴이는 인간을 한번 세계-안에-있음이라기보다는 <사이에-있음>이라고 규정해보려 한다. 이렇게 시도해보면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문제와 관련지어서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환경이란 인간이 사는 삶의 영역이다. 이것이 나중에 자연환경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환경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인간중심적인 것이다.  서구의 인간중심적 사고가 환경이라는 개념으로 나오게 된 것이며, 더 나아가 환경학 혹은 환경철학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인데, 이것은 다분히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이 잘살아보기 위해 땅을 포함한 모든 인간 삶의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생태학(Ökologie, Ecology)과 경제학(Ökonomie, Economy)은 같은 어원을 갖는다. 즉 오이코스(οικος)라는 그리스어로부터 나온 것이다. 거기에는 ‘집, 주거, 거주’라는 뜻이 있는데, Ökonomie는 ‘집안 살림살이’를, Ökologie는 ‘지구 살림살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Ökologie와 Ökonomie가 나누어져 있지 않고 <살림살이>라는 말로 합쳐져 있다. 즉 살림을 생활화하는 살이라는 우리말 <살림살이>는 살림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림살이의 철학>은 인간중심적 사고를 대체할 수 있는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 환경학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적 사고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관장하는 관점인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살림살이의 철학이다.  


인간은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어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가? 


1) 빔-사이에-있음


우선 <빔-사이>에 존재한다. 애초부터 인간의 빔-사이는 삶의 공간으로서, 인간이 비워[베어]내가며 닦아 가는 삶의 텃밭이다. 빔-사이에 있는 인간이 빔-사이에서 빔-사이를 이으며 관계맺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노동>이다. 이 노동활동은 도구, 기술, 예술, 제작, 생산, 거주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빔-사이를 존재하는 인간의 중심축은 <몸나>라고 할 수 있다. 몸으로서의 나가 모든 것을 활용해서 땅이라는 공간을 일구어 나간다. 이 몸나가 경험해 나가는 차원은 감각적, 미학적 차원이며 그 주된 방식은 제작이라는 형태를 띤다.

 

몸나가 살기 위해 쉬는 숨을 <목숨>이라 이름한다. 현대에 와서는 이 빔-사이의 간격을 없애려고 하지만 이 사이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의 시대, 차이의 시대에서 인간은 서로 가까워지기는 하여도 차이를 차이로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그런 태도 속에서 차이를 차이로서 뛰어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이 네 가지 차원에서의 사이에-있음을 유지하고 견지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릴 것이다.

 

공간이라는 빔-사이를 우리는 다양한 기술로써 없애면서 온갖 형태의 거리를 좁혀나간 결과 이제는 비행기, 인터넷, 위성통신 등과 같은 첨단기술을 이용해서 전지구가 하루생활권에 들어온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식으로 공간적인 간격을 없앰으로써 인간이 의도한 가까움을 얻었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빔-사이를 존재해 나가기 위한 필요한 덕목은 <나눔>이다.

 

2) 사람-사이에-있음


인간은 <사람-사이>에 존재한다. 사람-사이를 잇는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말>이며, 사람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맺음의 방식은 <실천>이다. 말함과 실천에서 관습, 윤리, 도덕, 사회, 국가 등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사이를 존재함인 실천 행위는 윤리적인 행위, 만남, 인격적인 체험 같은 것인데, 그것을 통해 사람-사이의 이음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인간의 사람-사이에 있음이 사이를 두면서 사이를 나누며, 사이를 이으면서 사이를 존재하는 관계맺음의 방식이다. 사람-사이에 있음을 이어나가는 중심축을 우리는 <맘나>라고 이름할 수 있다. 맘나는 마음씀이다. 사람-사이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주는 숨은 말의 숨으로서 <말숨>이다. 사람-사이의 간격을 없애려는 것이 평등이며, 여기에서는 각자가 자신으로 서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섬김>이 중요한 덕목으로 부각된다. 사람-사이에 있음이 무너지게 되면 도덕과 윤리가 설 땅을 잃게 된다. 

 

3) 때-사이에-있음


사람은 <때-사이>에 존재한다. 기억이 과거의 것에 주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사이의 가장 전형적인 행위를 <생각>이라고 이름하며 거기에서 반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때-사이는 역사, 학문, 지평, 엄격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나는 곳이다. 인간은 삶의 순간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나가는 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전체를 내다 볼 수 있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란 없다. 동물은 생존적인 시간만을 몸으로 살다가 죽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앞을 내다보고 뒤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역사의 발견은 바로 때-사이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근원과 유래를 돌아봄으로써 과거의 전통을 세우고 현재가 과거에 의해 새롭게 의미부여 받도록 한다. 더 나아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까지 눈을 돌려 때-사이로서의 존재가능성을 확대시켜 그 가능성에 비추어 현재를 변화시켜 새롭게 발전시켜 나간다.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유래와 미래로 뻗치며 때-사이를 잇고 있는 인간은 그 뻗쳐있음으로 인해 환한 밝음의 장소 안으로 들어서 있게 된다.

 

땅의 공간뿐 아니라 [역사적] 시간의 공간이 얼마나 넓으며 밝은가에 따라서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인간은 때-사이를 잇기 위해 글을 발견한다. 인간은 글을 통해 자신의 뜻이 후대에까지 전달되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때-사이를 잇는 사람의 중심축은 <뜻나>이다. 여기 ‘뜻나’에서는 <주체>의 의미가 부각된다. 주체로서의 나는 몸나와 맘나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빔-사이와 때-사이를 이을 나를 걱정해야 한다. 공자의 뜻나는 『논어』에 그의 뜻이 담겨 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져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때-사이를 이어주는 생명의 숨은 <글숨>이다. 때-사이를 존재해야 하는 모든 존재자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자 덕목은 <비움>이다.

 

4) 하늘-땅-사이에-있음


사람은 천지간(天地間), <하늘-땅-사이>에 존재한다. 여기에서 하늘은 천체적․우주적 하늘이기보다는 신적인 하늘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우주적인 하늘-땅-사이에 있음을 책임져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도 책임을 져야 한다. 서양에서도 처음에는 인간의 이러한 신적인 차원이 고려되었는데,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서양인들의 생각이 근대화․세속화 되어오면서 이 차원이 배제되었다. 즉 차츰차츰 인간에게서 기도, 감사, 초월, 성스러움, 신, 종교 등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차원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뒤편으로 쫓겨났다. 어쨌건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영성의 차원이다.

 

얼로서의 나인 <얼나>가 나의 참 모습이고 이 얼나가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우주(하늘)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아우름은, 하느님과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이 우주가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진다. 바로 이 하나로 아우러진 일치된 우주생명의 숨을 쉬는 것이 <얼숨>이다. 또는 우주의 숨이라 해서 <우숨>이라고도 한다. 우숨이 우주와 조화가 되어, 우주와 하나가 되어 쉬는 숨이기에 그 우숨을 또한 참된 숨이라는 의미로 <참숨>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하늘과 땅-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주생명에 동참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과 덕목은 서로 함께 더불어 살아나가는 삶으로서의 <살림>이다.


인간은 이렇듯 사이에 있는 ‘사이존재’다. 공간존재, 시간존재, 인간존재, 천지간존재다. 인간은 바로 사이를 살고, 사이를 나누고, 사이를 살리고, 사이를 이어야 하는 사이존재다. 바로 이러한 사이로서 사이역할을 하면서 사는 사이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서양사람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면, 새로운 차원이 있다. 서양에서도 요즘 존재를 보는 눈, 자연을 보는 눈을 그전과 같은 원자적 시각에서 관계적 시각으로 바꾸고 있다. 서양적인 사고방식은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찾아나가는 환원적인 방법에 익숙해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 그들이 찾아낸 것은 원자고 개체고 개인이다. 이렇게 각기 떨어진 낱낱의 원자 또는 개체에서부터 전체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서양의 사유방식이고 이것을 실체론적 사고방식이라 한다. 이와는 다르게 동아시아는 예전부터 관계론적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애초부터 따로 떨어진 개체를 보지 않고 그것이 어떤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노력했다. 개인으로서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관계 속에서 내가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교원으로서 있는 것이다. 서양사람들도 최근에 와서는 실체론적 사고방식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관계론적 사고방식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물망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관계론적 사고방식이 그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한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지듯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지구의 딸과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닥친다. 인간들이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단지 그 그물 속의 한 올일 뿐. 그 그물에 가하는 모든 일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다.”(인디안 추장 테드 페리의 말.)


4. 몸성히, 맘놓이, 뜻[바탈]태우, 얼돌이[얼들이]

 

하늘을 모으고 땅을 모은 것이 ‘’인데 이 모인 상태가 밖으로 나타나는 데에 따라 그것은 ‘맘’이 되고 ‘몸’이 되고 ‘믐’이 된다. 태극점이 밖으로 나간 상태를 표현한 것이 ‘맘’이다. 우리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내가 모은 하늘과 땅을 상대방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고 하는 것은 각자가 모은 하늘과 땅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가 자기가 모은 몸(힘)과 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한다. 현대에 들어서서는 몸으로 상대를 지배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즉 뜻, 의욕, 욕구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하는 것이 더 무서운 폭력으로 대두되고 있다. 다석은 그러기에 마음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놓아 보내라고 말한다. 빔 사이에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라고 ‘몸성히’라고 말하며, 사람 사이에서 마음에 집착하여 욕망과 욕구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놓아 보내라고 ‘맘놓이’를 권한다. 맘놓이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뜻나에서는 ‘뜻태우’, 즉 뜻을 태우라고 말한다. 뜻을 바탈이라고도 해서 ‘바탈태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 안에 주어져 있는 뜻(바탈), 속알을 태우라는 것이다. 나 혼자 잘 살자고 할 것이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문화와 세계평화, 지구와 우주를 위해서 내가 받은 바탈과 속알, 내 안에 새겨져 있는 깔, 꼴, 결을 찾아 태워서 그 모든 공동체가 한얼을 품을 수 있도록 살라는 것이다. 다석은 바탈태우를 얼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다. 글쓴이는 다석을 공부하면서 뜻과 얼이 때때로 뒤섞여 쓰이곤 하지만 많은 경우 둘을 나눌 때 더욱 풍부한 내용을 품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석 자신은 말하지 않는 얼나와 관련지어 많은 고민을 하였다. 몸성히, 맘놓이, 뜻태우. 그 다음 얼나의 차원에서 이루어야 할 일을 무어라 이름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그래서 만든 개념이 ‘얼돌이’이다. 얼을 돌려 한얼의 정신을 우주 곳곳에 펴자는 뜻이다. 한얼을 내가 받아 돌려 한얼과 내가 일치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주의 얼인 한얼과 하나가 된다는 점이다. 얼을 돌린다는 ‘얼돌이’나 얼 속에 들어간다는 뜻의 ‘얼들이’ 가운데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


다석이 얘기하는 얼은 ‘한얼’이다. 한얼과 얼나의 일치가 다석이 생각하는 영성적인 차원이다. 우리말의 ‘한’은 ‘온통, 크다, 전체, 온전함’을 나타낼 때 쓰인다. 다석은 아래아(․, 태극점) 앞에 ‘한’ 자를 더해 모든 시작의 시작, 가장 큰 태초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한․’[한아]를 말한다. 여기서 숫자의 시작인 ‘하나’가 나온다. ‘하늘’은 ‘한’과 ‘늘’이 합해져 나왔다. 여기서 ‘한’은 무한한 절대 공간을 말하며 ‘늘’은 늘, 항상, 언제나 그런 것이다. 즉 무한시간, 절대시간을 말한다.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 만난 곳이 ‘한늘’이고 그것이 ‘하늘’로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하늘님, 하느님이 나왔다. 우리가 이름한 하느님 이름 안에도 우리의 생활방식, 삶의 문법이 배어 있다.

 

얼은 보이는, 보이지 않는 모든 변화를 주재하는 힘이기에 모든 존재하는 것 속에서는 우주의 얼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도 우주의 얼이 들어 있다. 우주의 얼을 그 전체에서 통째로 보면 그것은 곧 생명력 그 자체로서 우주생명이며 한얼이다. 다석은 이 많은 표현들은 인간이 우주 속에서 우주생명인 한얼과 교통하는 가운데 이름붙인 것들이라고 하였다. 그것들은 다 어떤 형태로든 한얼의 말건네옴에 대한 인간 쪽에서의 대답이다. 그런 한에서 그 이름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신을, 성스러움을 이름 속에 잡아넣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가이 있는 인간으로서 세계를 만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가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가’가 있는 이름을 붙여주어야지만 그 신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을 부르는 다양한 이름들 속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인간 쪽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 이름들은 자신들이 어떤 부름에 대한 대답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것은 우주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신의 이러저러한 면모 가운데 하나를 찍어서 이름 속에 담고 있다. 그 이름이 가리키고 있는 그 존재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른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이름들 속에서 하느님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름 그 자체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많은 이름으로 지칭되는 절대자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 한얼에 들어서 그 얼을 돌려 우선 내가 그 한얼과 하나되고 그 다음 우주의 모든 것들이 한얼과 하나되는 큰 해탈을 도와야 한다. 그 일을 함이 ‘얼들이’고 ‘얼돌이’이다. 얼나로서 한얼과 하나되어서 한얼 속에 들어 그 한얼을 돌려 우주를 살리는 우주의 생명력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5. 몸살이, 맘살이, 뜻살이, 얼살이

 

1) 몸살이와 먹음(알음알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합적인 사유다. 노장 사상(도교), 불교, 유교, 기독교,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 녹아 들어가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우리의 삶의 길을 터줄 수 있는가에 다석은 관심을 가졌다. 몸만을 아끼는 삶에는 한계가 있다. 전에는 맘의 차원까지도 강조가 되었다. 하지만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점차 친구 사이에도 네 것 내 것 없이 같이 어울려 서로 함께 먹고 놀던 풍토도 사라져버려 없다.

 

그들은 기계(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들을 기계와 함께 보내고 있다.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총기 사건들의 경우 많은 부분 아이들이 현실세계와 가상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기계화된 마음과 현실에 인간의 양심과 마음씀이 들어설 수 없다. 인간이 몸에만 집착하여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기계에만 빠져든다면 산업적인 구두기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산업적인 구두기에 빠져 몸살이에 사는 사람들은 ‘먹다’라는 낱말을 가장 좋아한다. 사람들이 서로 마음써주는 교류 없이 몸이나 물질 또는 기계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대하다 보니 사용하는 낱말도 인간들 사이의 마음의 교류가 아닌 육체적 차원의 신진대사에서 따온 말들이 주를 이루면서 생겨나는 현상 때문이다. 사람 사이만이라도 사이좋게 사이 나눔을 하여야 한다.

빔 사이, 몸, 물체와 연관지어서는 감각적인 차원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알음’에서 나왔다. 우리의 몸으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개체적이고 구체적인 알음이다. 알음알이를 통해서 알게 되는 알음이다. 여기서는 육체적인 근육의 힘이 크게 작용한다.

 

2) 앎 맘살이와 삶

 

다석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뜻과 얼의 차원이다. 몸나의 차원에서 즐겨 쓰는 말이 ‘먹다’이지만 보편적인 표현은 ‘보다’이다. 맘 사이의 보편적인 표현은 ‘알다’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아는 것이다. ‘알다’에서 ‘알음’이 나왔다. 모든 알음은 ‘알이’고 모든 ‘알이’는 ‘앓이’다. 인간은 아픔을 통해서 알게 되고 배우게 된다. 몬 사이, 사람 사이, 몸살이, 맘살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알이는 그런 알음알이다. ‘알이’는 무엇이 어떠한 것인지를 몸으로 알게 되는 그런 알음이다. ‘알’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알음’이다. 이 알음에서 ‘아름다움’이 나왔다. 몸차원에서 알음이 알음다움[아름다움]이다.


맘의 차원에서 알음이 보편적인 지식으로 확대되어 그것은 앎[지식]이 된다. 몸의 차원에서 생명의 활동이 단순히 육체적인 에너지를 사르는 ‘사름’으로서의 삶이라고 한다면, 맘의 차원에서는 그 삶을 알아 이 앎을 다시 삶에 되먹임하는 그러한 ‘삶을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앎이 지혜다. 사람은 그러한 삶의 지혜를 갖고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이러한 앎의 관계를 우리는 착함(선함)이라 표현한다. 착함은 ‘작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작다’는 ‘싹’에서 나왔다. 새싹은 아주 작다. 이 작은 새싹이 착함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석의 우리말 풀이를 계속해보자. 기본 닿소리인 ㄱ, ㄴ, ㄷ, ㄹ는 앞에서 얘기하였다. ㅁ은 모으는 것이다. 모아서 모이면 넘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위나 옆으로 넘친다. ㅁ, ㅂ, ㅍ이 그 현상을 형상화한 글꼴들이다. 넘쳐서 나른 데로 간 것은 이제 새롭게 시작된다.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 ㅅ이다. 그것은 다시금 ㅅ, ㅈ, ㅊ로 넓어져 퍼져나간다.

 

3) 뜻살이와 깨침


뜻으로서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뜻을 읽어내는 것이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뜻을 읽어내려 시도한 책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민족의 뜻을, 더 나아가 ― 다석이 강조하듯이 ― 하느님의 마루 뜻을 읽어내야 한다. 이 마루 뜻이 우리의 역사 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뜻의 차원은 깨침이고 참 곧 진(眞)이다. 진리로서의 참은 속이 꽉 차 있음을 말한다. 참은 채움이다. 채운 것은 자람이 있어야 한다. 작은 새싹이 돋아나 자라서 자신을 채워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그 열매는 땅에 떨어져 다른 생명을 위한 음식이 되어 자신을 나눠주고 자신을 비워 새로운 생명을 위한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러한 열매→속알→싹(솟다)→자라다→채우다→열매→나눔→비움의 우주적 연관관계에서 참다운 이치를 알아볼 수 있다. 인간은 거기서 자신의 본모습과 역할을 배워야 한다.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있는 속알(우주의 생명력 또는 바탈)을 알아보고 그것을 자라게 하여 꽉 채워 열매로 맺어 내놓아야 한다.


4) 얼살이와 깨달음


얼나의 차원에서는 비우는 것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추는 차원이 더 있다. 하늘과 땅 사이라는 생명의 차원에서 볼 때, 생명의 원칙은 비움과 나눔이다. 생명의 세계는, 하나의 씨앗이 그 껍질[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썩히고 비우고 나누어야 새싹이 돋아난다. 그리고 그 싹이 자라 열매를 맺고 다시 땅속으로 돌아간다.

 

생명 자체는 끊임없이 나누고 비우는 나눔과 비움이다. 서양사람들은 생명의 현상에서 비움과 나눔이 아닌,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살육경쟁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똑같은 생명현상에서 적자생존, 자연도태, 우승열패 등으로 설명되는 생존경쟁을 보았고 그것을 모델 삼아 무한경쟁이라는 무시무시한 자본주의 시장논리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생명관이 다르기에, 세계관이 다르기에 그들이 본 진리와 우리가 본 진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얼의 차원은 깨닫는 것이다. 깨침과 깨달음은 다르다. ‘깨침’은 머리의 차원이다. ‘깨달음’은 머리로 깨친 것을 이제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혼자서만 그 진리를 품어서는 안 되고, 세상에 널리 알려 그 진리가 빛을 발하도록 선포하여야 할 사명까지도 있다. 깨달음은 거룩함과 연관되어 있다. 다석은 거룩함과 성스러움을 하느님과 관련지어 말하면서 ‘없이 계심’이 거룩함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전형적인 비움과 나눔을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나누어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없는 것은 아니다. 태극 밖에는 무극이 있고 모든 사이를 가능케 하는 사이로 텅 빔이 있다.

 

6. 21세기의 영성적 인간

 

우주진화의 꽃인 인간 안에는 지난 200억 년의 우주적 영성이 무의식적인 앎의 형태로 녹아 있다. 우주적 진화 속에서의 인류의 발달도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학자들은 인류의 진화의 역사가 그 흔적을 개개인의 몸속에 남기며 그것이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어두운 영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의 종족발생적 차원의 경험들이 개개인에게 각인되어 개체의 삶의 과정 속에 개체발생적으로 반복되며 서서히 새로운 경험의 요소와 차원을 넓혀가고 종족발생적으로 이러한 새것들을 유전자 속에 각인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종족발생적인 차원에서 인류의 현 시대적인 시점은 개인의 발달사에서 어느 시점을 나타내고 있을까 한 번 생각해봄 직하다. 주체의 시대인 근대가 그 극에 이르고 이제 주체의 죽음과 해체를 주장하는 탈근대적인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는 현대를 되돌아볼 때 자기의 뜻과 주장이 확고하여 마음먹은 바를 꼭 관철하고야 마는 고집스러운 불혹의 나이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인들의 인생관에서 50대는 무엇을 뜻하는가? 세속적으로 이룰 것은 다 이루어 놓고 시간이 남아돌아 시간을 죽이고 있는 나이는 아닐까?

 

그 남아도는 시간을 육체적인 쾌락의 탐닉에, 스포츠에, 소비에, 무언가 새롭고 흥미로운 것 찾기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가(자유)시간을 여행에, 다양한 취미생활에, 다양한 문화생활에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불가능에 도전하며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실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음악과 미술과 같은 창의적인 예술활동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새로운 형태의 초월을 체험하고 신적 존재를 만나기 위해 세속을 떠나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이 모든 것에서 참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허탈감 속에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현재적인 경험이 장래의 어느 시점에 종족발생적으로 인류의 무의식에 각인되어 인류의 미래의 모습을 규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적인 삶에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탐욕, 다툼, 경쟁, 지배, 소유, 소비, 소모, 방탕, 후안무치 속에 50대에서 삶을 끝낼 것이라면 지금 이대로 기계화된 마음에 우리 자신을 맡겨버리면 될 것이다. 그러면 인류도 아마 21세기를 온전하게 넘기지는 못할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천년은 아마도 인간 없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인간이 우주진화의 꽃이자 구슬로서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서양의 많은 지성인들이 그토록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갈구하며 고대했는가 보다.


21세기는 새로운 영성, 정신성, 종교성의 시대가 될 것이며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성인들이 많다. 자세히 고찰해 볼 때, 그것은 우리의 개인 발달적인 삶의 전개하고도 통하는 점이 있다. 우리는 50대를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제 자신의 자아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주체성만을 고집하는 인간 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하늘의 뜻을, 우주의 숨은 명을 알아야 하는 나이가 아닌가? 육체에 묻히거나 가족이나 민족의 울타리에 갇히거나, 돈이나 이념에 눈이 멀어버리지 않고, 나 중심, 민족 중심, 종파 중심, 인간 중심에 빠지지 않고, 욕망을 비우고 맘을 자유롭게 놓아 우주의 얼과 하나되는 그런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는 나이가 아닌가? 그럴 때 인류가 고대하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를 열 수 있지 않는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할 가치들은 바로 이러한 영성의 시대를 예비하는 가치들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나이 50은 이렇게 영적인 나인 <얼나>로 깨어나 내 안에 있는 속알[性, 天命]을 깨우쳐 알아 그 바탈을 태우게 되는 나이이다. 나 하나도 주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정력제를 찾아다니는 나이이어서도, 가족과 가문에 매여 문벌․학벌․재벌의 울타리에 갇혀 명예와 권위에 안주하며 만족해하는 나이이어서도, 민족과 국가, 문화와 이념의 일면성에 눈이 멀어 자기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정당화 속에서 언어의 놀이에 도취되는 나이이어서도 안 된다.

 

침묵 속에서 내 안에서 말걸어오는 <없이 계신 하느님>의 부름에 응해 우주적 대해탈의 역사에 동참하려는 원대한 꿈을 키워야 할 나이이다. 인류의 나이는 기술문명의 편함에 모든 것이 퇴화되어 버린 그런 무기력한 나이에 고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류는 영적인 <얼나>의 단계로 솟나야 한다. 그럴 경우 우주의 진화는 그 방향을 달리 하게 될 것이며, 이 우주는 인간을 털어내서 인간 없이 그 생성과정을 계속하려 하지 않고 인간과 더불어 또 다른 새로운 천년들을 맞이하려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다석의 말을 귀담아 듣도록 하자.


“지구에서 인류를 털어버린다고 해서 무엇이 서운하겠습니까? 똥벌레 같은 인류가 생각[념(念)]으로 사상을 지어내는 점이 동물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나마 고마워해야겠지만 그 사상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아직 결론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하늘 위 신천지(新天地)에서 정의를 기(企)하여야 합니다. ... 우리의 사상은 누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은 신념을 갖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사람에겐 반드시 관념(觀念)이 있어야 합니다. 몸은 비록 30대까지만 자라지만, 마음은 80, 90세까지 계속 자랍니다. 영원한 사상을 갖는다는 것은 관념보다 강한 신념(信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에는 정의나 진리의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신념 시대입니다.

*

출처: <다석 류영모의 인간론.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씨의 소리』통권 제174호(2003년 9/10월호), 71〜99)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