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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 선생의 신에 대한 해석 - 이기상 교수

에코맨21 2020. 3. 30. 09:42

“허공이 참이다.” 텅빔과 성스러움. 다석의 신관


1. 있음과 없음, 그리고 그 기준

 

1) 있음의 관점에서 본 현실


어느 언어에서건 드러나게 또는 드러나지 않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근본 낱말은 ‘있음’ 또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있음에 대한 이해에 따라 개인의 인생관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고 민족의 세계관이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 증거를 멀리 가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우리들 자신이 그 증거들이다. 백 년 전 한국인의 삶, 자연관이 지금의 우리의 인생관, 세계관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기만 하면 된다. 인간의 ‘눈’은 단순히 생물학적 기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눈은 보이지 않는 의미로 짜여진 미세한 그물망이다. 예전과 오늘날 우리들의 의미의 그물망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이것을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한다면,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에서 예전의 존재이해는 서양의 존재이해에 의해 쫓기고 말았고, 이제는 이것이 안방을 독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의 눈은 이제 더 이상 선조들의 눈과 같지 않다. 오히려 서양인들의 눈과 더 가깝다. 우리들은 이제 서양인들이 자연을 보듯이 자연을 보고, 그들이 사람을 대하듯이 그렇게 사람을 대하고, 그들이 사물을 다루듯이 그렇게 사물을 다루고 있다. 서양인들의 ‘존재이해’가 우리들의 사고방식, 생활태도, 욕망까지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강한 문화가 약한 문화를 포섭하는 것은 일면 당연해 보인다. 더욱이 그 동안 변방에서 괄시와 천대만 받고 살아온 우리가, 서양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제 한번 어깨를 펴고 세계시민으로서 당당히 세계무대에서 그들과 똑같은 의식으로 세계를 보며 세계문제를 같이 풀어간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많은 서양 지성인들이 지적하듯이 현대의 근본문제가 바로 서양인들의 세계 내지 자연을 보는 눈, 다시 말해 존재의 시각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시각이라면 말이다.


우리의 ‘존재시각’이 뒤지고 유치하고 전근대적이라고 포기해 버리기 전에 한번 그 근본구조라도 탐구해 보고 정리하는 것이 다른 존재시각을 찾아 나선 인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존재와 무, 있음과 없음에 대한 논의에서 항상 주도권을 잡는 것은 존재이며 있음이다. 무(無)나 없음은 그러한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에 의해 존재에 딸린 속성적인 것으로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뿐이다. 더구나 엄밀함과 정확함을 생명으로 하는 학문적 논의에서 언어로 이해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는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무는 당연히 제외되고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한번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주도하는 관심에 문제는 없는가라고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애초부터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기 위해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학문적 태도에는 문제가 없는지 말이다.


존재와 무, 있음과 없음을 구별하여 다루는 철학적 논의에서 기준은 무엇인가? 서양인과 동양인의 차별성과 독특함을 연구하는 논의에서 그 준거 틀을 서양인에게서 찾아 그 잣대로 연구를 수행한다면 그러한 연구는 일방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동양인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사태 연구를 애초부터 막을 것이다. 존재와 무에 대한 논구에서도 이 유비가 어느 정도는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존재와 무를 다루면서 우리는 처음부터 우리의 시각을 존재의 관점으로 축소하여 보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서양인들이 생각해온 ‘존재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무(無)나 없음까지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이고 포괄적인가? 아니면 있음[존재]마저도 제대로 담지 못할 만큼 폐쇄적이고 협소한 것은 아닌가?


존재의 기준은 무엇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가늠하는 준거 틀은 무엇인가? 우리의 오감이라는 감각인가? 우리의 사유인가? 지성 또는 이성인가? 이해인가? 언어인가? 역사인가 문화인가? 초감각적인 신적 이성인가? 과학적인 합리성인가? 생활세계적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인가? 우리는 어떤 기준에 의해서 어떤 것은 있다 하고 어떤 것은 없다고 하는가? 이와 같이 우리는 확실하고 자명하게 일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사용되는 ‘있음’이라는 이 낱말의 의미의 자명성이 전혀 분명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2) 없음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눈앞에 있음이라는 현전의 의미만을 확고하게 견지한 서양의 존재시각만이 유일한 시각인가? 아니면 다른 존재시각도 가능한가? 이를테면 관점의 중심을 없음 또는 무(無)로 옮긴 그런 시각 말이다. 그러면 ‘있음’의 의미마저도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예전의 존재이해는 서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에 바탕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다석을 통해 그러한 ‘없음’ 중심의 존재이해를 살펴보도록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있음)를 경험하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어떻게 생활화하였는가이다. 그 다음 그것을 어떻게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체계화했는가가 학문적인 논의에서 관심을 끄는 사항일 것이다. 서양철학은 처음부터 신적인 것에 모든 것을 맞추어 보려고 노력했다.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신적인 법칙이 작용하는 현실을 살면서 신적인 이데아를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삶이었다.


우리 한국인은 우리의 있음을 어떻게 무엇으로 경험하였는가? 우리는 우리의 있음을 구체적인 있음으로 경험하였다. 즉 하늘 아래 땅 위, 여기 이 구체적인 공간에서 지금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을 살면서 남과 더불어 삶의 터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우리의 있음을 ‘하늘-땅-사이에(天地間)’, ‘빔-사이에(空間)’, ‘때-사이에(時間)’, ‘사람-사이에(人間)’ 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였다.

 

우리의 있음의 근간을 이루는 구조는 ‘사이에-있음’인 것이다. 사이에 있는 것은 그 사이를 사이로서 이루어주고 있는 그 가능조건에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사이에 내던져져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있음’은 그러한 다양한 사이들을 ‘잇는’ ‘잇음(이음)’[사이-이음]이고, 다양한 사이로서 ‘있음’[사이-임]이고 다양한 사이를 다른 사이에 있는 것들과 나눔[사이-나눔]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있음을 우리 선인들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절대적 무한 시간과 천지 사방팔방 그 끝을 알 수 없는 절대적 무한 공간(= 텅빔, 빈탕한데)에서 한 점, 한 끝을 차지하고 있는, 그것도 찰나의 한순간에 잠시 있는 ‘있음’으로 경험하며 받아들여 왔다. 나의 공간적 있음이란 무한한 절대공간의 상 아래에서 볼 때 마치 무한한 우주 공간 안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무한한 텅빔(빈탕한데, 빔-사이) 속에 놓여 있는 한 점으로 있음이다. 나의 시간적 있음이란 영원한 시간의 상 아래에서 볼 때 더-이상-있지-않음(지나간 과거)과 아직-있지-않음(오지 않은 미래)이라는 없음과 없음 사이를 잠시 동안 잇고 있는 찰나적 이음이다. 이렇듯 나의 있음이란 한 점에 지나지 않는 한 긋의 찰나적인 이음으로서의 있음이다. 절대적인 공간의 한 점을 그것도 찰나적인 한 순간에 빤짝이며 있다가 다시 절대 공간의 어둠 속으로, 무한 시간의 없음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별똥이다. 나의 있음이란 그야말로 없음(텅빔)과 없음(텅빔) 사이를 잇는 이음으로서의 있음인 것이다.


이러한 있음의 사건에서 무엇이 기준이 되랴! 절대 공간과 무시무종의 시간을 통째로 온전하게 잡을 길은 없지만, 어떤 것이 ‘참으로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것이 정말 ‘있는 것’일 것이다. 그 무한 공간과 시간 속에 잠시 있다가 스러져 버리는 그 많은 존재라는 것들은 실은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고 미미한 있음이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있음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잡을 길 없는 절대 공간과 무한 시간을 ‘있음’의 원형으로, 표본으로 보았다. 이러한 절대 공간과 무한 시간을 이름할 수는 없지만 억지로 이름하여 한늘(절대 공간인 ‘한’ 과 무한 시간인 ‘늘’), 하늘, 한아(한), 하나, 한얼, 하느님, 하나님, 한얼님, 한울님이라 불렀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참으로 있는 것, 온전한 것, 깨지지 않은 것,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 어떤 것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성스럽고 거룩하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시간을 다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저 침묵의 끝을 알길 없는 어두운 우주 공간과, 무한히 뻗어 가는, 바닥이 없는 검푸른 심연의 푸른 창공이 그리고 지나온 역사와 앞으로 닥쳐올 미래의 사건까지도 자신의 영원한 고요와 적막 속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저 하늘이 성스러웠고 신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그러한 무한을 순간적인 있음이라는 쪽박으로 잡아 담으랴!


“내가 사는 데를 ‘여기’라고 한다. 그제 저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이제’가 내가 사는 것이다. 사는 때가 이제이다. 사는 때가 이제, 사는 곳이 여기이다. 이어 이어 내려와서 여기가 된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이어주고 나는 하느님과 이어지고 다시 이어 이어 여기 온 것이 나라는 것을 생각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도 이제 나왔고 운명할 때도 이제 숨을 걷는다고 한다.”


“나는 이 민족의 한 끄트머리 현대에 나타난 하나의 첨단이다. 나의 정신은 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긋을 찍는다. 가온찍기()이다. 이 한 긋(點)이 나다. 나는 한 끄트머리이며 하나의 점이며 긋수이기도 하다.······한 금을 내려 그은 줄 ‘ㅣ’를 ‘이’라고 발음하며 [그것은] 영원한 진리의 생명줄을 말한다. 영원한 생명이 시간 속으로 터져 나온 한 순간이 ‘이’ 긋이다. 영원한 생명이 공간으로 터져 나와 몸을 쓰고 민족의 한 끄트머리로 이 세상에 터져 나온 것이 나라고 하는 ‘제’ 긋이다. 또 이 몸 속에서 정신이 터져 나와 가장 고귀한 점수를 딸 수 있는 가치가 ‘이 제 긋’이다.······이렇게 시간, 공간, 인간의 ‘긋’이 모여 영원한 생명인 ‘ㅣ’가 나타나 이어 이어 계속 나타나 이 땅위 예에 예어 나가는 나다. 나는 일점광명(一點光明)의 긋이다.”

 

2. 없음과 하느님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하늘’을 본 삼아 사유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하늘은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포함하는 쪼개질 수 없고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한 전체라고 파악하였다. 서양의 종교발달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즉시 다음과 같이 토를 달아 해설할 것이다. 인류의 시작에 인간의 종교적인 의례와 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하늘에 대한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그렇지만 그런 하늘 신, 땅 신, 물 신, 나무 신 등과 같은 유치한 신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극복되어 우주 창조의 신으로서의 유일신 사상으로 발전되어 나왔다고. 그리스도교에서 볼 수 있는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 사상이 인류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발달된 종교 형태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신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사상가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양의 잘못된 신관을 비판하며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현대에 만연된 비종교, 반종교, 무종교 운동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인 교리와 협소한 신관에 기인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하느님을 특정 종교의 교회탑 안에 가두어둘 수 없듯이 우리는 하느님을 특정 관념으로 붙들어 놓을 수 없다. 하느님은 개념으로 거머쥘 수 없는 존재다.

 

개념에 잡힌 하느님은 진정한 하느님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오만이 하느님을 개념 속에 붙잡아 놓고 자신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신마저도 이용한 것, 아직도 계속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이성의 차가운 개념의 틀로 붙잡힌 신이 과연 본래의 ‘신다운 신’일까? 이러한 오만의 극치로 말미암아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이 신을 죽이기 전에 이미 신은 인간 세상을 떠나갔다. 왜냐하면 신이 있을 만한 성스러움의 솟터가 없기 때문이다.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이 투명하게 설명되어 버린 세계 안에 신비스러운 신의 비밀이 나타날 수 있는 곳은 없다. 인간의 편함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속화된 세계에서는 신마저도 인간의 편이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무한한 경쟁과 무한한 소유를 부추키며 고무풍선처럼 욕망을 한없이 부풀리고 있는 욕망의 나라에는 신이 머무를 자리란 없는 법이다.


이렇게 욕망의 네온사인이 거리를 수놓고 있는 환락의 세상은 실은 신이 떠나버린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오직 떠나간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떠나간 신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이 나타날 수 있는 성스러움의 영역을 예비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성스러움의 영역을 예비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사유는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사유한다. ······ 존재의 진리에서부터 비로소 성스러움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성스러움의 본질에서부터 비로소 신성의 본질이 사유되어야 한다. 신성의 본질의 빛 속에서 비로소 ‘신’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이름해야 하는지가 사유되고 말해질 수 있다.”


우리의 좁은 존재이해의 지평이 우리의 삶에서 신을 몰아낸 것이 아닌지를 반성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존재사건의 마당이다. 그 마당이 하느님이 나타나기에 너무 좁고 너무 더럽다면 하느님은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존재마당이, 존재시각이 하느님을 쫓아낸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기여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서양의 철학과 신학에서는 존재를 무에서 창조라는 관점에서 보았는데, 거기에는 암암리에 ‘제작’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모델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신은 아주 유능한 제작자이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우주만물을 만들어낼 정도로 전능하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우주를 창조하였다고는 하나 어쨌거나 거기에 신은 있었던 것 아닌가? 시작부터 어려운 모순에 걸리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렇다. 아무튼 신은 존재하는 것 가운데 최고의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제일원인이며 최종근거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하였으면서도 그 자신은 영원히 계속 존재해온 자기존재의 자체 원인이기도 한 그런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이와 같은 잘못된 존재이해가 신을 죽이고 신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누가 그런 제일원인이며 최종근거이며 자체원인인 신에게 무릎을 꿇고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자기희생을 하려고 하겠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신성함이 차가운 합리화의 논리에 따라 사라져버려 이성이 만들어 놓은 ‘가짜 신’일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신의 ‘있음’도 담을 수 있는 더 넓게 트인 터가 필요하다. 과연 무한하고 영원한 신을 담을 수 있는 터가 있는가? 우리는 이제 발상의 전환을 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었던 신에 대한 관념을 송두리째 털어 버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한계짓는 ‘있음’의 지평이, 신이 나타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계가 없는 ‘있음’, 시작과 끝이 없는 ‘있음’을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있음’ 자체가 있음의 지평 안에서만, 즉 공간과 시간 안에서 테두리지음에 의해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있음 속에 하느님을 담을 수는 없다. 테두리지어지지 않은 있음, 한계가 없어 사방팔방 무한히 열린 있음은 한마디로 ‘빔’이다. 텅빔이며 빈탕한데이다. 있음의 관점으로 보자면 없음인 ‘무’이다. 이 텅빔과 무가 이제 하느님의 나타남을 예비할 성스러움의 솟터는 아닌가?

 

3. 텅빔과 성스러움 (신적 차원)

 

다석이 없음, 텅빔, 빈탕과 하느님을 함께 설명하는 부분들을 정리하여 구별 지어 보도록 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본디 이름이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이면 이미 신이 아니요 우상이다.” “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인데 무슨 이름을 붙이는 것도 좀 이상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없습니다... ‘나는 나다’, 이것이 모세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신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이름할 수 없는 하느님을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한 부름 속에는 부르는 쪽의 관점이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임의적인 시각이 아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보아야 할 것, 이름해야 할 것의 말건네옴에 대한 인간 쪽의 대답인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다양한 ‘이름’들을 고찰하면서 거기에서 말건네오는 하느님의 얼굴들을 드러내보도록 하자.

 

1) 하나님: 절대공, 단일허공, 무극으로서의 한․(한아, 하나, 한 나[大我])님


하나이며 전체로서의 하느님을 우리는 ‘하나님’이라 이름할 수 있다. 우주란(宇宙卵)이 생기기 전의 절대허공, 태극 이전의 무극을 상정하여 보자. 태극이 전개될 수 있는 가이 없는 절대공의 상태 내지는 마당, 아직 아무런 존재자도 등장하지 않은 텅 비어 있음, 빈탕한데, 무엇으로도 막혀 있지 않은 확 트여 있음,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절대 가능성의 상태가 태극 이전의 무극일 것이다. 논리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아무런 내용도 품고 있지 않은 순전한 형식 규정이다. 근본구조를 위한 바탕이다. 아직 아무런 갈라짐과 나뉨이 없기에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로서 단일하고 온전하며 전체다. 그야말로 없음 그 자체이며 거룩함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태극의 유래로서의 무극, 있음의 유래로서의 텅빔(없음)을 바탕으로 하여 그 안에서 전개되는 모든 있음의 사건까지도 포함한 하나이며 온전한 전체를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가 거기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절대적 원천으로서의 ‘한’이다. 모든 개체로서의 ‘제나’들을 다 자기 안에 안고 있는 큰 나로서의 ‘한 나[大我]’이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단 하나밖에 없는 온통 하나(전체)는 허공이다. 색계는 물질계이다. 색계는 환상이다. 나는 단일 허공을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느껴진다. 단일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끌과 같이 섞여 있다. 색계에 만족을 느끼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을 찾을 생각도 못한다. 색계는 허공에 딸려 있다. 허공은 우리 오관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무한하다. 잣 알 하나를 깨뜨리니 속이 비었다는 그따위 허공이 아니다. 우리는 전체인 단일 허공의 존재(하느님)를 느껴야 한다. 참(眞)이란 허공밖에 없다. 물질인 있음(有)의 색계는 거짓이다.”


물질이 아닌 허공은 청정하고 거룩하다. 다석은 절대공(絶大空)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허공은 맨 처음 생명의 근원이요 일체의 근원이다. 처음도 없고 마침도 없는 하느님이다. 허공은 우리의 오관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다. 잣알 하나 깨어 보니 빈탕이라는 그따위 허공이 아니다. 단 하나의 존재인 온통 하나가 허공이다. 환상의 물질을 색계라 한다. 유일 존재의 허공에 색계가 눈에 티끌과 같이 섞여 있다. 허공은 하느님의 맘으로 느껴진다. 허공을 석가나 장자가 얘기했는데 이것이 이단시되었다.”


하나이면서 큰 것은 허공(虛空)이다. 그저 허공이 아니라 중심은 있으되 가장자리가 없는 공(球)과 같은 무한한 허공이다. 이 일대(一大)의 허공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 허공에 유한우주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허공을 무한우주라고 말할 수 있다. 천체(별)로 이루어진 유한우주가 팽창하자면 무한우주가 없어서는 팽창할 수가 없다. 이 무한우주인 허공만을 노자는 무극(無極)이라, 허극(虛極)이라고 하였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이 허공에 가야 평안하다. 허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는 다르다. 태공(太空)이다. 일체가 거기에 담겨 있다. 모든 게 허공에 담겨 있다. 이걸 믿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대(多大)라는 것은 무한 허공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천체까지를 말한다. 허공은 별을 모아 놓은 곳간과 같다. 허공과 천체들을 합해서 말할 때 태극이라고 한다. 태극이 음양이라고 하는 것은 태극의 내용인 천체들이 상대성을 띄고 있어 변화한다는 뜻이다. 태극의 본체인 허공은 변할 리가 없다.
“하느님은 무한한 공간의 큰 늘(常)이요 한 늘(常)인 영원한 무한우주다. 우리 머리 위에 받들어야 할 님이시라 한우님이시다.”


참(眞)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다. 빈탕(허공)에 가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빈탕이 참이다. 생각해보면 존재하는 것은 허공뿐이다. 모든 천체 만물은 허공 속에 날아다니는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빈탕 허공이 천체와 만물을 창조하고 지양한다. 빈탕 허공이 순환운동을 하는 것은 빈탕 허공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허공이 살아 있는 말씀이라 천체 만물을 창조하고, 허공이 권위의 절대존재라 천체만물을 지양한다.


하느님의 마음인 허공은 둘레가 없는 공이라 끝이 없다. 끝이 없는 허공을 생각하면 아찔하여 소스라치게 놀랄 뿐이다. 천심(天心)은 웅대하고 허공은 장엄하다. 웅대하고 장엄한 천심 허공에 일천억의 태양별을 지닌 은하우주가 일천억을 넘는다. 무려 1022개의 태양별이 펼쳐 있다는 것이다. 별을 없는 걸로 치면 무한 허공이 무극이고, 별을 있는 것으로 치면 무한 허공이 태극이다. 또 우리 맘속에 한없는 얼을 주시니 영극(靈極)이다. 성령의 영극, 허공의 무극, 천체의 태극이 다 합하여 하느님이다. 있는 모두 그대로가 하느님이다. 이를 스피노자와 노자는 ‘자연’이라고 하였다. 이 자연은 성령, 허공, 천체로 이루어진 있는 그대로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하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라 절대다. 무극이 태극이요 태극은 하나다. 태극은 엄연히 하나(절대)요 영원히 하나다. 하나가 쪼개지거나 벌어졌다면 그것은 하나(절대)가 아니다.”
하나는 전체라는 뜻과 절대라는 뜻이다. 전체와 절대는 유일존재로 하느님밖에 다른 존재는 없다. 이 존재는 없이 있는 허공이다. 절대 허공이 전체이고 절대 허공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생멸의 물체를 개체라 한다.

 

2) 한늘(하늘)님


한늘님은 무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생성 소멸 변화되는 모든 것을 포함한 절대존재로서의 하느님이다. ‘한’은 무한 공간을 의미하며 ‘늘’은 무한 시간을 의미하니 그 둘이 합쳐진 ‘한늘’ 또는 그 변형태인 ‘하늘’은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을 포함하는 절대존재로서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시간적 공간적 사건들을 포함한 절대존재를 지칭한다.


위에서는 강조점이 있음의 유래로서의 없음에 놓여 있었다면 여기서는 그 절대공의 없음을 배경으로 하여 벌어지고 있는 모든 존재사건을 통틀어 가리키고 있다.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 안에서 벌어졌고 벌어지며 벌어질 그 모든 있음들을 간직하고 있는 절대존재로서의 하느님이 간직하고 있는 상대존재로서의 무한한 개체들을 그 상호관계에서 고찰하는 것이 여기에서의 시각이다. 없음의 무한 허공에 있음의 지평(돔)들이 끊임없이 세워지고 넓어지고 사라져 없어지며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잇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 놓여 있는 한 점 끄트머리일 뿐이다. 그것은 다시 자신의 유래인 절대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해 무극인 텅빔이 그릇으로서의 바탕, 마당이라면, 그러한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 안에서 전개되는 생성 소멸 변화의 모든 존재사건들은 그 무한한 그릇을 잠시 채우다가 사라져 가는 내용물들이다. 하늘님은 텅빔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주재하므로 거룩하다.


하느님은 실체인 무(無)와 양태인 유(有)로 되어 있다. 하느님은 무와 유, 바꾸어 말하면 공(空)과 색(色)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는 자꾸만 바뀐다. 무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체인 하느님으로는 바뀌면서도 바뀌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한다.


“대우주 전체는 언제나 자기가 아니면서 자기다. 자기가 아니라는 것은 계속 변해 간다는 말이다. 계속 변하여 자기가 없어지지만 대우주는 여전히 대우주라는 것이다. 변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는 무와 변하는 유의 양면을 가졌기에 전체로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서 변한다.”


구경각을 이루었음을 드러내는 가장 간단한 말은 무타(無他)다. 하느님밖에는 다른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절대존재인 것이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유일한 존재인 하느님 안에 부속물로 있을 뿐이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가 하느님의 내용물이다. 하느님을 떠난 시간이 어디 있으며 하느님을 떠난 공간이 어디 있는가.


 다석은 변하지 않는 절대의 무와 변하는 상대의 유를 합친 것이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 다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부속이고 내용이기 때문이다.
“허공인 하늘과 물질인 땅(相對)을 합한 것이 하느님이다. 절대의 무와 상대의 유를 합한 것이 하느님이다. 절대를 무극이라, 상대를 태극이라 한다. 태극․무극은 하나라 하나가 하느님이다.”
무(無)는 변하지 않는데 유(有)는 변한다. 우리는 지금 변하는 유가 되어 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무를 그리워한다. 무가 유의 밑동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말하였다.

“자꾸 바뀌고(變易), 자꾸 사귀고(交易), 그 가운데 바뀌지 않는 불역(不易)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바뀌는 것은 상대생명이요 바뀌지 않는 것은 절대생명이다. 바뀌는 것은 겉나요 바뀌지 않는 것은 속나이다. 절대세계는 상대세계를 내포하기 때문에 바뀌면서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변화하는 겉나(몸)에서 변화하지 않는 속나(얼)로 솟나면 무상(無常)한 세상을 한결같이 여상(如常)하게 살 수 있다.”


태극과 무극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한 가지로 하느님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태극이라, 무극이라 다른 말을 쓰게 된 것은 까닭이 있다. 어느 쪽의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른 것이다. 상대에서 절대를 보면 절대에 안긴 상대(만물)가 다 보여 태극이고 절대에서 상대(만물)를 보면 상대는 없고 절대(하느님)뿐이다.


상대적 존재란 있어도 없는 것이지만 전체인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사명)이 있어 존재의 값어치를 얻게 된다. 우리는 나 자신이 상대적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적 존재는 낱 수가 많은 작은 것들로서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 존재는 모든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로서, 유일 절대의 존재로서 없이 있어 비롯도 마침도 없다. 한마디로 상대적 존재인 개체는 유시유종이고 절대적 존재인 전체는 무시무종이다. 그러나 개체인 우리는 전체인 하느님을 잃어버렸다. 개체가 할 일은 전체로 돌아가 전체를 회복하는 것이다. 개체의 참 생명은 전체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회복하고 전체로 복귀하는 것이 영원한 삶에 드는 것이요, 참된 삶을 이루는 것이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지나간 무지를 바로 알아 잊어버린 전체를 찾아야 한다. 하나(절대)를 찾아야 한다. 하나는 온전하다. 모든 것이 이 하나(절대)를 얻자는 것이다. 하나는 내 속에 있다. 그러니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3) 한얼님


한얼님은 무한 공간과 무한 시간을 채우고 있는 신령한 힘을 말한다. 우리는 이를 절대생명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사람이 얼나이기 때문에 절대생명인 한얼과 소통할 수 있다.
다석에 따르면 ‘성스러움’, 즉 ‘거룩함’은 한마디로 ‘없이 계심’이다. 인간이 이 ‘없이 계심’에 가까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에게 더 이상 ‘성스러움’도, ‘신적인 것’도, ‘신성’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이 ‘없이 계심’에 대한 시야를 되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떠나버린 신의 도래를 기대할 수 없다. 이 거룩함은 몸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눈으로도 볼 수 없다. 오직 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인간이 얼나로 솟나야만 그 성스러움을 맞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성스러움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다석에 따르면 사람이 거룩한 하느님,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무한한 우주의 허공을 보는 것이고, 둘째는 우주에 깔려 있는 무수한 별무리를 보는 것이고, 셋째는 내 마음 속으로 오는 성령을 만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에 이르는 길 가운데 여태껏 간과해온 ‘무(無)’가 핵심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절대의 하나로서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아’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그렇게 모든 것을 아우르며 지탱시켜 주는 거룩한 힘인 성령, 또는 다른 말로 ‘한얼’을 만나게 된다. ‘허공’, ‘한아’, ‘한얼’을 ‘한울님’, ‘하느님’, ‘한아님’, ‘하나님’, ‘한얼님’으로 부르든 이름은 중요치 않다. 우리는 어차피 이름 속에 없이 계신 하느님을 잡아넣을 수는 없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없다면 어때,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다. 얼[靈]이다. 얼은 없이 계신다. 절대 큰 것을 우리는 못 본다. 아직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자는 것이다.”


있는 모든 것, 전체가 하느님이다. 무한 허공에 많은 별들이 고기떼처럼 유영하는 것이 하느님이다. 거기에 하느님의 얼은 없는 곳이 없다. 이 전체 존재, 절대 존재가 하느님이시다. 모든 것은 얼과 빔의 하느님이 변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의 근본은 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는 물심(物心)의 경계가 있을 리 없다. 무가 실체요, 유는 무의 변태이다. 그러므로 다시 무로 돌아가야 한다. 무는 살아 있는 무이기에 얼의 무요, 얼의 공이다. 그 얼이 내 맘속에 솟아오른다. 그래서 전체인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얼을 보내주지 않았으면 알지 못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참이신 하느님은 없는 것 같다. 없는 것 같은 것이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얼로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가득하다.”
“시작했다 끝이 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끝을 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낳아서 죽는 것이 몸이요, 죽어서 사는 것이 얼이다. 얼은 제나가 죽어서 사는 생명이다. 형이하(形而下)에 죽고 형이상(形而上)에 사는 것이다. 단단히 인생의 결산을 하고 다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개요 회심이다. 얼에는 끝이 없고 시작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코로 숨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나는 소용이 없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말숨(말씀)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이 얼나인 참나다. 석가의 법심, 예수의 하느님 아들은 같은 얼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사람은 남녀의 피부접촉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하느님의 몸이라 할 수 있는 허공을 깊이 느낄 때 하느님의 거룩하고 부드러운 살에 닿는 맛에는 비길 수 없다. 하느님을 사랑함은 거룩함을 입음이다. 다석은 빔(허공)을 깊이 느껴서 말하기를,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허공밖에 없는 이 세계에 얼나는 허공의 아들이다. 절대의 아들이다. 절대의 아들인 얼나가 참나인 것을 깨닫고 요망한 몸나에 대한 애착이 가셔지는가가 문제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올라간다. 그때가 되면 하나인 허공이 얼나를 차지할 것이고, 허공을 차지한 얼나가 될 것이다. 이러면 얼나의 아침은 분명히 밝아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얼이 지구의 지각 밑에 들어 있는 암장이라면 사람의 입으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암장이 아니라 용암(magma)이다. 암장에는 용암과 함께 가스가 있다. 땅위로 분출되면서 가스는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용암만 보지 암장은 못 본다. 사람의 입으로 나온 말씀에는 이치만 있지 거룩은 볼 수 없다. 그것이 천음(天音)과 인언(人言)의 차이다. 음(音)과 언(言)의 글자의 형성은 비슷하다. 둘 다 창으로 찌르는 것을 형상화한 신(辛)과 입의 모양을 형상화한 구(口)를 합친 회의문자다. 지각을 뚫고 올라오는 암장처럼 마음을 뚫고 나오는 말씀이다. 지각을 뚫고 나오는 용암을 막을 수 없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막을 길이 없다. 다석은 말한다. “생각을 자꾸 하는 사람은 말을 하고 싶다. 참 말씀을 알고 참 말씀을 하려는 사람은 그 가슴 속에서 생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이다.”

 

4) 하느님


인간이 구체적으로 소통하면서 나타나는 절대존재는 하느님이다. 역사 안에 말씀의 형태로 자신을 내보이시는 하느님이다. 절대생명으로서의 한얼의 부름에 사람이 응답하였고 이 응답으로 이름을 받은 신이 하느님이다. 생각으로, 사람의 말로, 말씀으로 파악되어 어느 정도는 이성의 대상이 된 신이 ‘하느님’이다.
다석은 말한다.
“하느님이 그리워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줄여져 글이 되었다.” “이 세상은 거저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실을 뽑아 말씀의 집을 지으러 왔다. 하느님을 생각하러 왔으므로. 말씀의 집(思想)을 지어야 한다.”
“생각이 문제요 말씀이 문제다. 생(生)도 사(死)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생각이다. 사람은 진리의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문제다. 위로 올라가는 생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참이다. 나를 통한 성령의 운동이 말씀이다. 성령은 내 마음 속에서 바람처럼 불어온다. 내 생각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은 것이 말씀이다.”


“오직 하느님의 뜻밖에 없다. 영원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어도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소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이다.”


“큰 성령이신 하느님이 계셔서 깊은 생각을 내 마음속에 들게 하여 주신다. 말은 사람에게 한다. 사람과 상관하지 않으면 말은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사는 까닭에 말이 나오게 된다. 생각이 말씀으로 나온다. 참으로 믿으면 말씀이 나온다. 말은 하늘 마루 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우리는 그 말을 받아서 씀으로 하느님을 안다. 그렇게 말을 받아서 쓴다고 말씀이다.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써야 한다. 하느님과 교통이 끊어지면 생각이 결딴나서 그릇된 말을 생각하게 된다. 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지면 이승의 짐승이다.”


“사람은 몸을 쓰고 있다가 맘으로 바뀌고, 맘을 쓰고 있다가 뜻으로 바뀌고, 뜻을 쓰고 있다가 얼로 바뀌어야 한다. 봄이 여름으로 바뀌고, 여름이 가을로 바뀌고,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것이 자연이다. 하늘, 땅을 펼친 우주적 자리에서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이 자연이요 인생이다.”

 

5) 하느님과 있음


다석의 하느님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크게 네 가지를 구별하여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 온통 하나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 무극과 태극 그리고 영극(靈極)까지도 포함하기에 텅빈 온통 속에, 가이-없는 ‘빔-사이’와 끝없는 ‘때-사이’ 안에서 생성, 소멸, 변화하는 모든 것을 다 품고 계시며 주관하는 하나님, 그리고 변화의 한가운데에서도 온통 전체를 유지 보존하고 끝없는 힘돌이, 열돌이, 숨돌이, 피돌이로써 되어감의 맴돌이와 되삭임, 되먹임하고 이루어나가는 신비로운 힘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즉 텅빈 온통, 무시무종(無始無終)의 텅빔 속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의 생성 소멸 변화의 사건 전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절대적 하나인 온 전체 속에서 운행하시는 신비스러운 힘 그 자체 이러한 세 가지 국면을 지니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둘째는 이중 무극만을 떼어내 고찰한 절대공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모든 있음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텅빔 그 자체를 의미한다. 셋째는 태극, 즉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되어감의 전개과정, 생성, 소멸, 변화를 주관하는 하늘님으로서의 하느님이다. 넷째는 흔히 하느님의 마음이라 표현되는 우주의 얼로서의 한얼님이다. 텅빔 속에 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얼에 따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서로 교통할 수 있다.


다석에 따르면 무(無)는 단일허공(單一虛空)인 전체다. 그런데 단일허공 안에서 천체를 비롯해 우주의 먼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체가 생겼다. 이것은 허공이 변해서 생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허공밖에 없는 허공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개체는 허공에서 잠깐 동안 있다가 없어진다. 단일허공은 영원 무한한 데 비해 개체들은 공간적으로도 작고 시간적으로도 짧다. 그러나 하늘의 별은 무수하게 많다. 이러한 개체들은 반드시 원래 모습인 무(無)로 돌아간다. 사람도 그러한 하나의 개체다. 이 개체는 한번 왔다가 가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뜨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석은 말한다.
“우리는 지나가는 한 순간밖에 안 되는 이 세상을 버리고 간다면 섭섭하다고 한다.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길을 우리가 가고 있다. 일왕불복(一往不復)이다.”
상대적 존재란 있어도 없는 것이지만 하느님에게 받은 사명이 있어 존재의 값어치를 얻는다. 우리는 스스로가 상대적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적 존재는 낱 수가 많은 작은 것들로서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 존재는 모든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로서, 유일 절대의 존재로서 없이 있기에 비롯도 마침도 없다. 한마디로 상대적 존재인 개체는 유시유종(有始有終)이고 절대적 존재인 전체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그런데 다석에 따르면 개체인 인간이 전체인 하느님을 잃어버렸다. 개체가 할 일은 전체로 돌아가 전체를 회복하는 것이다. 개체의 참 생명은 전체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회복하고 전체로 복귀하는 것이 영원한 삶에 드는 것이요, 참된 삶을 이루는 것이다.


무극인 무(無)에서 유(有)가 나와 태극이 되었다. 유(有)가 나오지 않았으면 무극일 뿐이다. 그러나 유(有)만이 태극은 아니다. 유(有)를 내포한 무극이 태극이다. 무극은 무(無)라 불변의 절대이다. 그러나 태극의 유는 바뀌는 역(易)이다. 시시각각으로 계속 바뀐다. 바뀜을 멈추는 일은 없다. 바뀌는 유(有)도 줄곧 바뀐다는 것만은 불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상대세계에 와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여기에서 할 일은 우리가 변화를 잘 이룸으로써 불변의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는 전체라는 뜻과 절대라는 뜻이다. 전체와 절대는 유일존재로 하느님밖에 없다. 이 존재는 없이 있는 허공이다. 절대 허공이 전체이고 절대 허공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생멸의 물체를 개체라 한다.

 

4. 성스러움에 대한 관심

 

글쓴이는 <하이데거에서의 존재와 성스러움>이라는 논문에서,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시를 통해 제시해 보인 성스러움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즉 온전함(전체성), 열려 있음(개방성), 자신을 숨김(은닉성) 그리고 신비스러운 힘(작용성) 등이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밝혀 보인 성스러움의 차원과 다석이 생각한 성스러움의 계기들이 근본에서는 합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존재자에 방향이 붙잡힌 시각으로는 이러한 성스러움을 예감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온통 전체로서, 전체성 그 자체로서 경험의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고 경험의 가능조건으로서의 열려 있음 그 자체로서 경험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을 숨기고 있는 비밀스런 힘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성스러움은 도대체 있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없는 것(무)이다.
존재 중심의 시각으로도 그 성스러움을 사람들은 예감할 수 없다. 열린 장의 열려 있음과 시공간을 모두 포괄하는 온통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존재의 지평 속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존재의 지평을 가능케 하는 끝이 없는 열려 있음이고 바닥 없는 심연, 가이 없는 텅비어 있음이다. ‘있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공간 안에서 머무르고 시간 안에서 흘러감을 전제한 것임을 고려에 넣을 때 온통 전체로서의 성스러움은 가이-없는 공간과 끝이 없는 시간 전체를 통틀은 것이다. 그것은 그렇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한 없음을 우리는 앞에서 ‘없이-있음’이라고 이름하기로 했다. 존재자에 눈이 멀고 현전 중심의 존재이해에 얽매여 존재를 현전하는 것의 현전함 속에서만 볼 경우 성스러움의 영역은 없다. 존재망각의 역사와 더불어 성스러움의 영역이 사라지고 그래서 신들이 떠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기술과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성스러움이 외면되고 있는 불행한(heil-los, 온전치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불행은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도 전혀 그런 온전치 못함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세계 속에서 오히려 포근함과 안온함을 느끼고 있다는 데에 있다. 가장 큰 위기는 위기 속에 던져져 있으면서도 그 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거기에 있다.


그런 위기가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 곧 서양철학, 형이상학 곧 서양 형이상학이 하던 서양 중심의 형이상학적 이해의 틀을 탈피해야 한다는 서양철학자들의 주장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탈레스에서 시작된다는 철학 자체의 시원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그 사건은 단지 그리스적인 존재자 전체로의 침입사건일 뿐임을 우리는 하이데거와 더불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형이상학의 유일한 근원이나 유래일 수는 없으며 형이상적인 것에 대한 탐구의 전형이 될 수도 없고 더구나 존재사건 그 자체일 수는 결코 없다. 나아가 하이데거는 존재사건에 대한 유럽적인 대응투사가 너무나 로고스적이고 학문적이어서 존재와 차이, 무(無)와 은닉을 애초부터 제대로 숙고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거나 제거해 버린 원천적인 무(無) 제거의 역사였음을 비판하면서 그러한 사유태도의 근원적인 한계를 밝혀내고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자 중심, 현전 중심, 탈은폐 중심, 인간주체 중심의 존재역사가 몰고 온 위험을 우리가 처해 있는 기술과 과학의 시대의 가장 큰 위험으로 간주하며 그에 대한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표상하는 사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전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숙고와 논의를 원천적으로 막아 버린 귀결이 오늘날 지구 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파괴와 환경파손이며, 이것은 그동안 봉쇄당했던 무(無)가 벌이는 ‘무(無)의 반란’의 현상임을 하이데거는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존재와 무, 차이와 은닉에 대해 우리 자신을 열고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방식을 새롭게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 중심의 사유태도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사유태도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지구, 하나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지구적 시대를 맞이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도 서로 협심해서 현대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적 위기에 공동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당위성을 깨닫고 있다. 여기에 유럽과는 다른 문화적 전통 속에서 살아온 한국의 철학자들이 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다. 그것은 곧 동양 문화권에서 일어났으며 일어나고 있는 존재사건에 주목하여 그에 대한 여기 이 땅에서 현존재의 대응방식을 연구하여 그 독특함을 천착해내는 일이다. 서양이 자기중심적인 우월감으로 자신만의 전통을 고집하며 자기 시각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존재자 중심, 로고스 중심으로 고찰해 왔다면, 일찍부터 서양문화가 침투함으로써 자유롭지 못하게 존재자 전체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야 했던 동양인들의 열린 시야가 이제는 문제를 새롭게 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동양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세계문화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고 행위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적 숙고함이 필요하다. 우리의 전통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달라진 해석학적 상황과 이해의 지평에 대해 성찰하여 우리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존재이해의 틀을 만들도록 힘써야 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무(無), 공(空), 허(虛) 등의 비존재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많이 쏟아 왔던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태도가 유럽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에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다. 지금까지 ‘비논리적’이며 ‘신화적’이고 너무나 ‘애매모호하다’고 학문적 논의의 장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주제들이 실은 존재사건에 대한 참다운 대응방식에 관심을 두었던 선조들의 조심스러운 사유태도에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 존재발생사건에 대한 시원적이고 대안적인 다른 대응투사방식을 찾고 있는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다석 류영모의 영성적 사유는 충분히 활짝 열린 길로 안내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다석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절대 진리는 하늘 위에 있기에, 우리는 중간에서 그 ‘절대’를 좇아 올라가야 합니다. ‘절대’가 아닌 것은 생각하지 말고, 지상의 것은 거의 전부 훨훨 벗어버리고 ‘하나’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의 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절대 진리를 위해서는 내버릴 것은 다 내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다 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생(生)을 가진 자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하여 나갑니다. 애(愛)는 영원한 ‘사랑 애’입니다. 이 세상이 되고 안 되고는 영원한 님을 찾는 사랑의 힘을 갖느냐 못 갖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출처: <다석 류영모에게서의 텅빔과 성스러움>(2000년 11월 18일 체코 올로모츠에서 개최된 국제현상학회 발표원고, 『철학과 현상학 연구』제16집 (2001년 6월), 353〜392)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