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 선생의 생명관 - 이기상 교수
“살아서 살라서 살려라!” 일름을 따르는 몸사름-다석의 생명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거저 내주시며
없이 계심 같이 너희도 가진 것을 나누며 없이 살라!”
1. 현대의 생명위기와 영성
혹자는 다석의 생명사상이라는 말을 들으며 도대체 글을 남기지도 않은 사람인데 생명에 대한 이야기 거리가 있기나 한가하며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몇 쪽 안 되는 글을 보고 그가 반평생 동안 명상하며 적어놓은 『일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평생 그를 붙잡았던 화두가 다른 것이 아닌 ‘생명’ 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다석은 쉬임없이 줄기차게 여러 각도에서 생명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이 곧 기도라는 그의 말을 떠올릴 때 생명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느 할일 없는 사람의 심심풀이 공상이 아니다. 다석은 마치 자신의 삶 전체를 생명이라는 놀음판에 판돈으로 걸고 죽기살기의 모험을 벌이 듯 치열하게 살다 갔다. 그의 생명사상은 단순한 생명에 대한 이론이나 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그의 모든 삶을 바쳐 증거하고 증명한 한 편의 생명증거이다. 그의 삶이 곧 그의 생명사상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그의 사상이 곧 그의 삶인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다석 생명사상의 독특함은 한마디로 그 영성차원에 있다. 그리고 21세기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생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영성적 차원이다. 다석은 유럽이라는 절대중심에서 벗어나 지구 위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살아갈 삶의 원칙을 찾느라고 일생을 바친 사상가이다. 우리는 지금 온갖 이념과 세계 종교가 뒤섞여 공존해야 하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삶의 문법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다석은 그 해법을 위해 평생 노장사상, 불교사상, 유교사상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상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사상을 찾아내려고 애쓴 지구촌 시대의 사상가다. 다석은 이러한 세계철학적인 문제를 풀어갈 해결의 실마리를 바로 한국인의 영성적 심성, 자연친화적 생활방식, 통합적 사유얼개, 우리말의 상생적 문법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석에 의하면 말을 보이게 하면 글이고, 글을 들리게 하면 말이다. 말은 하느님의 마루뜻[宗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글은 하느님을 그리는 뜻[思慕]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말 속에서 말건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좋은 문학, 좋은 철학이 나올 수 있다. 지금같이 남에게서 얻어온 것 가지고, 외국어 갖고서는 우리의 사상을 키워나갈 수 없다. 다석은 “글자 한 자에 철학개론 한 권이 들어 있고 말 한마디에 영원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천지인 합일의 영성적 세계관에 주목한다.
아래에서 먼저 우리는 젊은 다석의 생명 체험을 실마리로 삼아 그가 어떻게 생명문제에 접근하게 되며 어떤 시각에서 생명을 통찰하게 되는지를 고찰한다. 그 다음 ‘생명(生命)’을 ‘덧 없는 삶[無常生], 비상한 웋일름[非常命]’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의 생명사상의 단초를 살펴본다. 그런 뒤 이 둘을 나누어서 좀더 상세하게 다루도록 한다. 삶은 사름이라는 몸생명의 몸살이를 사름과 숨쉼의 관점에서 고찰한다. 그 다음 생명이란 하늘로부터 받은 바탈을 태우는 것이라는 얼생명의 의미를 말숨과 우숨[얼숨] 그리고 얼나의 하루살이를 갖고 살펴보도록 한다. 그 다음 이런 고찰을 바탕으로 해서 삶의 실상은 몸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는 제사라는 생명의미를 ‘식사는 장사며 제사’라는 설명 아래 고찰한다.
2. 청년 다석의 생명 체험
다석의 일생은 참생명을 찾아 나선 구도의 삶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지 고민하며 그것에 대해 깊이 사색했다. 이런 깊은 사색 뒤에 나온 생명에 대한 그의 생각의 한 올을 우리는 그가 처음으로 1918년 잡지 『청춘』에 발표한 글인 <오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석은 여기에서 “산다는 것은 때와 곳을 옮기면서 곧 내 생명을 변증하면서 일을 하는 것이니 나와 남과 물건 세 편이 연결하는 가운데 생명이 소통하면서 진리를 나타내며 광명(光明)이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석은 산다는 것이 주어진 공간[빔-사이]과 시간[때-사이]에서 나와 남과 물건을 연결함으로써 생명이 소통하여 진리가 나타나도록 함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때 그는 벌써 그가 그렇게 그의 생명력으로 개척하여 쓴 그의 글의 세계에 오늘 우리가 우리의 생명력을 가지고 들어가서 그와 사귈 수 있음을 예측하고 있다. 젊은 다석은 생명력을 발휘하여 나와 남과 물건을 연결시키는 일[작업]을 통하여 인간이 하루 동안에도 열 백 세계를 가를 수 있다고 노래한다. 그러면서 그는 삶의 실상을 ‘오늘 여기 나’에서 볼 것을 종용하며 “오늘 오늘 산 오늘!”이라고 외치고 있다. “산 오늘은 살게 써서 산가 싶게 살아야 한다.” 다석은 그의 첫글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하루 동안에도 열백 세계가 갈릴 수 있고 하루라는 것은 늘 오늘이라는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안다면 오늘에 자족 아니할 수 없고 자활(自活) 아니할 수 없다. 만반(萬般) 사물로 인연이 닿는 대로 만나는 사람 사람, 열리는 세계 세계에 오직 오늘, 신성한 오늘, 나의 진여(眞如)한 생명력을 지성으로 발휘하여 한갓 나를 대하게 된 그들의 생명력과 투합(投合) 일치하기를 바란다.”
1923년 『동명』에 기고한 글 <자고 새면>에서 다석은 어느 정도 자신의 생명사상의 큰 밑바탕을 그려 보이고 있다. 매일매일 오늘을 살며 1만 2천 일을 산 날인 1923년 1월 19일 다석은 “인생 1만 2천 밤을 자고 새면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인가? 무엇을 이룬 것인가?”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한다. “오직 생명이니라. 사는 것이니라. 모든 것이 참되게 살기 위하는 것뿐이니라. 정말 과거에 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지금 나의 목숨을 이룬 것이라’ 대답하겠노라. 과거 1만 2천 일 중에 잘한 것이 있었을 것 같으면 지금 나에게 귀한 내용이 되었을 것이요, 잘못한 일이 있다면 그만큼 지금 나의 내용이 빈곤하고 결함이 있었을 것이로다.”
이렇게 다석은 자신의 오늘의 삶이 우주적 생명사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의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천만의 멀고 가까운 인연을 따라서 하나의 결과 또는 천만의 결과를 맺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무슨 공적을 개인 한 사람이 이룬 것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어떤 죄과가 어떤 한 사람만의 행위라고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천고 만유를 인연한 업과(業果)”며 동시에 “억조 후생의 일인(一因)이 되는 것이니” 어찌 그 의의가 깊지 아니하며 책임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내 한 몸이 존재하기 위하여 6, 70년 전에 반드시 4대 조부모 될 인물이 생활에 분투하였을 것 같이 50대 전이나 백 대 전에는 무량수의 사람들이 인(因)을 닦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한 가치를 볼 때 무량수가 곧 하나의 수(數)요, 하나의 수가 곧 무량수인 것을 증험으로 알 수 있다고 다석은 말한다.
혈통만 볼 때에도 우리는 지금 나의 생명이 무량수의 다른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한 의식주를 고려해 볼 때 나는 억만 무수의 생물, 무생물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이 나의 생명을 중심으로 기막히게 하나로 통일되어 맺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이 몸 하나가 훗날 백 대에 억조를 번식케 할 인(因)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인을 끊고 일시에 생의 대명(大命)을 완료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다석은 여기서 이미 인간은 몸으로의 삶을 영위하면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는 사명을 깨달아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 하나로 “천년의 가치(値)를 일각에 표현할 수도 있고, 일각의 가치를 천년에 늘이는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다석은 이렇듯 일찍부터 생명의 신비스러움에 매료되었다. “네 생명을 보라. 현실에 있어서 오히려 신비하고 목전에 가장 영광된 것은 오직 생명뿐이니라.” “하루아침에 깨어서 생명을 본 이는 모든 것이 없어도 오히려 자중자락할 것이요, 모든 세상 것이 오직 이 생명을 거룩하게 이루게 하도록 쓰게 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줄로 보게 될 것이니라.”
청년 다석은 생명의 신비를 몸과 얼[정신]로 느꼈다. 몸으로서의 나가 지금까지의 모든 생물, 무생물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바로 지금의 나가 우주적 생명사건의 첨단[끝]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나는 이어 이어 나에게까지 이어져 온 우주적 생명줄을 계속 잇기 위해 생명사건을 지펴나가는 땔감이 돼야 할 사명을 타고났음을 깨달았다. 나의 생명(生命)에서 오늘을 살게 써서 생의 대명(大命)을 이루라는 하늘의 뜻[천명(天命), 웋일름]을 읽어낼 수 있을 때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바탈 곧 사명(使命)을 다하는 것임을 체험한다. 이러한 다석의 생명체험은 그의 훗날의 삶을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
3. 생명의 젓가락: 덧없는 삶[生], 비상한 웋일름[命]
보통 생명을 이야기할 때 학자들이 필수적인 요소로 들고 있는 것이 영양섭취[신진대사]와 자기복제[생식작용]이다.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생명체란 없다. 개체생명보존을 위해서 영양섭취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생명이 낱생명일 뿐이라면 생명의 사건은 진작 끝났을 것이다. 낱생명은 태어남과 죽음으로 테두리 쳐진 유한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낱생명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와 비슷한 후손들을 생산해내서 생명의 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힘쓴다. 종족생명보존을 위해서 짝짓기를 통한 생식작용은 필수적이다. 그래서 생명체에게 식욕과 종족번식욕구는 자연적으로 부여된 본성이라고 말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영양섭취[식(食)]와 생식활동[색(色)]을 배제하고 생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생물학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생명이야기이다. 다른 외국말과는 달리 우리말 ‘생명’에는 생물학적 차원 외에 형이상학적 차원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명(命)의 차원으로서 천명(天命)과 성명(性命)을 가리킨다. 다석은 생명이라는 현상을 ‘몸을 살러 하늘의 명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 몸이라는 상대생명을 제물로 바쳐 하나인 한얼이라는 절대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몸으로서의 내가 죽고 얼로서의 내가 한얼과 하나가 되는 것이 나의 삶의 본디 의미이다. ‘생명(生命)’은 본래 그 낱말의 뜻이 ‘살라는 웋일름[하늘의 뜻]’으로서 그 말 속에 두 차원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다석은 생물학적 차원의 식과 색을 버려야만 하늘의 뜻을 따르는 참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산해서 낳은 나는 짐승의 성질을 타고난 짐승이나 다름없다. 이 짐승의 성질은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가지려는 탐욕의 본능을 가지고 있고, 남과 싸워 이기려는 투쟁의 본능을 지니고 있고, 암컷과 교미하여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음욕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다른 생물들도 다 영양섭취와 생식이라는 본능을 타고나지만 자연적 필요에 따라서 먹어야 할 때에만 먹고 짝짓기 해야 할 때에만 짝짓기 한다. 그리고 생물들은 종국에 각기 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몸을 바쳐[살러] 우주생명을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하늘의 뜻을 성취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만이 식욕과 음욕에 빠져 식사와 남녀관계가 마치 삶의 목적인 듯이 동물만도 못하게 살고 있다. 다석은 이렇게 탄식한다.
“이 세상은 잘못되었다. 삶의 법칙이 잘못되었으니 못되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삶의 법칙을 식색(食色)으로 생각하고 있다. 재물에 대한 애착과 남녀에 대한 애착이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못된 것이다. 세상은 그것이 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있다. 못된 것을 바로 잡자면 밥도 처자도 잊어야 한다. 잊어버려야 한다. 식색으로 사는 것은 음란이요, 전란이다. 못된 세상을 바로 살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 구원이란 외적인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 아니다. 내적인 얼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 식색이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사는 것이다. 본 생명인 얼은 한없이 풍족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마르지 않다. 성신의 운동이 말씀이다. 생명이 영원함을 알면 당장 시원해진다.”
다석은 식색의 물신(物神)을 초월하지 못하면 우리의 정신생명이 자라지 못한다고 본다. 언제나 먹을 것을 삼가고 남녀를 조심해야 한다. 후손 끊어지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정신 끊어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몸생명 보존에만 넋을 잃지 말고 얼생명을 찾는 데 정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생명은 참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면 코로 숨쉬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얼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나는 소용이 없다. 숨 안 쉬면 끊어지는 이 목숨은 가짜 생명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말숨(말씀)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이 얼나인 참나다. 석가의 법심, 예수의 하느님 아들은 같은 얼나인 영원한 생명이다.”
이 몸생명은 가짜 생명이다. 참생명은 얼생명이다. 가짜 생명인 몸생명은 죽어야 한다.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짜 생명을 연명시키는 데만 궁리하고 골몰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람의 몸은 벗어버릴 허물이요 옷이다. 사람의 주인은 얼(靈)이다.
“어머니 배에서 나온 것이 참나가 아니다. 속알이 참나다. 겉사람(몸)은 흙 한 줌이요, 재 한 줌이다. 그러나 참나인 얼나(靈我)는 우주와 지구를 통째로 싸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다. 그것은 지강지대(至剛至大)하여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아무도 견줄 수가 없다.”
다석에 의하면 하느님이 보내시는 얼(성령)이 참나다. 거짓 나가 죽어야 참나가 산다. 나(자아)가 완전히 없어져야 참나다. 그리고 참나는 얼이라 하느님과 하나다. 참나와 하느님은 얼이라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리하여 유한과 무한이 이어진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진선미한 얼생명이다.
“자꾸 바뀌고(變易), 자꾸 사귀고(交易), 그 가운데 바뀌지 않는 불역(不易)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바뀌는 것은 상대생명이요 바뀌지 않는 것은 절대생명이다. 바뀌는 것은 겉나요 바뀌지 않는 것은 속나이다. 절대세계는 상대세계를 내포하기 때문에 바뀌면서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변화하는 겉나(몸)에서 변화하지 않는 속나(얼)로 솟나면 무상(無常)한 세상을 한결같이 여상(如常)하게 살 수 있다.”
상대적 존재란 있어도 없는 것이지만 전체인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사명)이 있어 존재의 값어치를 얻는다. 우리는 나 자신이 상대적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적 존재는 낱 수가 많은 작은 것들로서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절대적 존재는 모든 개체를 포괄하는 전체로서, 유일 절대의 존재로서 없이 있어 비롯도 마침도 없다. 한마디로 상대적 존재인 개체는 유시유종이고 절대적 존재인 전체는 무시무종이다. 그런데 개체인 우리는 전체인 하느님을 잃어버렸다. 이제 개체가 할 일은 전체로 돌아가 전체를 회복하는 것이다. 개체의 참생명은 전체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회복하고 전체로 복귀하는 것이 영원한 삶에 드는 것이요, 참된 삶을 이루는 것이다.
이상의 말에서 우리는 얼추 다석 생명사상의 알짬을 가늠할 수 있다.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낱생명은 참생명이 아니다. 낱생명들은 나서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나들이와 죽살이를 거듭하는 상대적 존재로서 상대생명일 뿐이다. 참생명은 이 모든 상대생명을 감싸면서 그것들을 살게 하고 있는 절대생명으로서 얼생명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주생명으로서의 이 얼생명은 텅빔 또는 빈탕한데로서 하늘이며 한얼이다. 모든 낱생명들은 자신들의 생명의 몸집을 태워 바치는 번제를 통해 우주생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데 동참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서 몸의 차원만이 아니라 얼의 차원도 있음을 깨닫고 있다. 얼생명으로서의 인간의 얼나는 우주생명인 한얼과 하나이다. 가짜생명인 몸나에 매달리지 않고 이 몸나를 끝까지 깨고 참생명인 얼나로서 솟날 때 사람은 한얼과 하나 되어 하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다. 우리는 아래에서 이 점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4. 삶은 사름. 몸생명의 몸살이
1) 몸사름 : 생명의 불꽃을 사름
우리말 ‘사람’이라는 말은 ‘삶’에서부터 나왔다. ‘삶’은 ‘살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살다’는 ‘사르다’에서부터 나왔다. ‘사르다’, ‘살다’, ‘삶’, ‘사람’으로 이어진다. ‘사르다’는 일종의 기운을 사르다, 그리하여 열을 내다, 에너지를 사르다, 열을 돌려서 힘을 만든다 등을 뜻한다. 열돌이와 힘돌이가 사르는 것이다. 인간만이 사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사르는 삶을 이어간다.
‘살다’라는 낱말에 간직되어 있는 우리 민족의 상상력과 기억을 파헤쳐 본다면 그 밑바탕에는 연소작용, 즉 불을 사르는 현상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살다’라는 말은 원초적으로 보아 불이 타고 에너지가 정지상태에서 운동상태로 옮아간다는 뜻에서 비롯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에너지는 태양에서 비롯되기에 태양은 예로부터 불의 상징이었고 삶의 바탕인 대지를 생성시키는 ‘화생토(火生土)’의 본거지이며 모든 생명체를 유지시키는 에너지 공급원이다.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정지상태에서 운동상태로 가는 것이 넓은 의미의 ‘사르다’, ‘살다’를 뜻한다면 땅 위, 하늘 아래에 변화하여 움직이는 모든 것은 사름(삶)을 명받은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산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불을 일으키는 것’이다. 생명을 사르기 위해서는 바람이 필요하다. 이 바람을 다석은 얼김 또는 숨김[숨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보통 호흡을 통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호흡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잘 살펴보면 숨김이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들숨날숨’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숨김이 낱생명 안으로 들고나지 않는다면 모든 생명체는 숨이 막혀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숨쉬면서[호흡(呼吸)하면서] 산화(酸化)작용을 하며 생명의 불꽃을 일으킨다. 이러한 얼김과 숨김이 일으키는 사름 속에서 숨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말[말숨]도 통하고 생각[뜻숨]도 통하고 신[얼숨]도 통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언제나 코에 숨이 통하고, 귀에 말이 통하고, 마음에 생각이 통하고, 영혼이 신에 통하는 삶을 생명이라고 한다. 생명은 통해야 살고 막히면 죽는다. 깊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비게 하고 마음을 밝게 하면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목숨을 키우고 생명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느끼고 높게 살게 하는 것, 깊이 생각하고 고귀하게 실천하는 그것이 생명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이 우주의 기운이 올라가고 빛이 내려옴도 다 우리의 목숨을 키우기 위해서 있다. 우주와 세계와 인생이 모두 목숨 키우기 위해 있다.”
그리나 다석은 목숨을 가지고 사는 것을 탐하면 그것은 얼빠진 사람이며 거짓삶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삶을 가지고 천명을 완성한 사람은 참 사람이요 진실이다. 마음을 가지고 몸에 집착하면 망령이고 몸을 가지고 마음을 살리는 것이 진실이다. 천명을 완성하기 위한 수단이 육체의 삶이다.
사람이 몸으로 숨 쉰다는 것은 산화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때 맘으로는 자아(自我)의 심주(心柱)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얼의 불을 붙여 생명의 불꽃, 말씀의 불꽃이 타오르도록 해야 한다. 나[자아(自我)]를 얼로 불태워 참나인 영생의 나로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 몸나를 살러 참생명의 불꽃이 타오르게 해야 한다.
다석은 생명의 성화로(聖火爐)에 생명의 불을 태우느냐 못 태우느냐를 늘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생각을 불사르는 것이고 그것으로 정신이 높아진다. 그럴 때 자꾸 말이 터지게 된다. 다석은 자신이 말을 자꾸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말에 태우는 것을 사른다고 한다. 생각의 불꽃을 태우는 것은 말씀 사뢰는 것이다. 우리 속에 생각의 불꽃을 사르는 것이 있으니 말씀을 사뢰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를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말씀을 사뢰는 중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불꽃이 있게 마련이다.
낱생명의 사는 살림이란 물질을 번제(燔祭)드려(불살라서) 그 피어오르는 불꽃으로(만물의 끝은 꽃이요, 꽃은 불꽃이다) 우주의 생명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람이 섭취한 식물도 필경은 피로 피고야말 꽃이요, 불꽃이다. 한 사람이 가진 적혈구가 24조 개로 피어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꽃바다며 불꽃바다로서 동산보다도 더 큰 바다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다석은 만물의 끝으로 된 이 피(에너지)가 불꽃 곧 번제라고 말한다. 그 불꽃을 반드시 위로 올라가는 꽃내(향기)로 씌워서 살라야, 사람이 사름, 말씀을 사름, 불을 사름이, 동일사(同一事), 동일사(同一詞)로 된다고 말한다.
거룩한 생각(사상)으로 살라 올려야만 한다. 머리를 무겁게 하여 떨어뜨리며 하는 생각은 사람을 죽게 하는 생각이 되지만, 머리를 위로 우러러 들게 하는 거룩한 생각은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불꽃이다. 이런 생각을 못함으로 사람의 머리가 아픈 것이고, 이런 생각을 계속하면, 그의 머리는 성향로(聖香爐)의 상구(上口)로 거룩한 불꽃을 온전히 위로 정(精)하게 올리는 임무를 하니, 그의 머리는 더욱 시원할 것이며, 전성단(全聖壇)(전신)의 제물(祭物)(에너지)도 치열하게 탈 것이다.
2) 숨쉼 : 목숨과 말숨
다석에 의하면 숨은 피를 돌리기고, 피는 양분을 옮기기고, 양분은 일할 힘을 내기이며, 힘은 양분을 얻는 것과 목숨을 돌아보는 모든 일을 하기 위함이니 숨을 위한 일이요, 일을 위한 숨이다. 다석은 사람이 코로 숨쉬는 호흡에서 한얼 또는 하느님의 숨쉼을 본다. 다시 말해 숨쉼을 곧 하느님의 숨어 쉼이라고 풀이한다.
사람은 일생동안 9억 번 호흡한다. 숨을 들이쉬는 것이 사는 것이며 숨을 내쉬는 것이 죽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들이마시고 한번 내쉬는 것은 한번 낳다가 한번 죽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한번 숨쉬는 데에서 생(生)의 덧없음과 명(命)의 보통 아님을 볼 수 있다. 숨을 한번 들이쉬고 한번 내쉬는 것이 곧 생명의 내용이다. 나무의 경우 나뭇잎은 돋아났다 지지만 나무는 그대로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변하는 것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을 본다. 사람의 경우에도 몸과 맘의 나로는 변하면서 얼의 나로는 변하지 않는데 바로 그것이 영생하는 것이다. 다석에 의하면 생명의 비결은 한결[常]을 알아 그 가운데 드는 것이다. 영원한 현재가 되는 것이다. 얼의 생명이 되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목숨은 기쁨이다. 사는 것은 기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기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다. 기도는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좇아 하느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생각은 진실한 것이다. 삶이 덧없어도 목숨같이 만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허무한 것 같아도 목에 숨쉬듯이 한 발자국씩 올라가면 하늘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다. “육체로 사는 생(生)은 무상하지만 정신으로 사는 명(命)은 비상한 것이다. 비상은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다. 독특하다는 것이다.
사명을 깨닫고 사는 삶은 독특한 것이다. 무상생(無常生) 비상명(非常命)이다.” 숨은 코로만 쉬는 것이 아니다. 정신으로도 숨을 쉰다. 정신의 숨이 생각이다. 다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이란 하느님의 숨어 쉼”이라고 말한다. 마치 나무에게서 태양이 숨어 쉬는 것이나 같다. 가을이 되고 봄이 되는 것은 태양의 숨쉼이다. 태양의 숨쉼에 따라 나무가 자라나고 나무가 시든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도 태양의 숨쉼이다. 그런데 사람의 숨쉼은 동물의 숨쉼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숨쉼이 겹쳐 있다. 다석의 제자 김흥호는 이것을 이렇게 풀이한다. “하느님의 숨쉼은 말숨 쉼이요 문화 문명의 창조다.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사람은 문화를 창조한다. 이것이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징표다. 문화의 창조, 이것은 쉴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사명을 잊고서 문화 창조를 안 하고 동물처럼 새끼나 치려고 한다. 이것이 죄악이다. 하느님은 쉬지 않고 우주를 창조하고 계시다. 이것이 하늘 소식이다. 우주는 나타났다가는 숨고, 계속 창조와 진화는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숨쉼이요 우주와 세계와 인생의 창조이다.”
다석은 성령의 바람을 범신(汎神)으로 보고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동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바람으로 정신적인 숨쉼을 한다. 성령이 바로 우리 맘의 얼이며 참나다. 다석은 성령과 통하는 사람은 모든 생명에서 하느님의 마루[뜻]를 읽어내고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여 말로 세워[말슴] 말로 쓰면서[말씀] 하느님의 소식을 전해주며 말숨을 쉬는 말씀[말숨]살이를 산다고 말한다.
다석에 의하면 사람의 살림살이는 단순히 먹고 자식을 낳는 몸살이로서 끝나서는 안 된다. 몸집 속에 몸을 사르며 위로 올라가는 생명의 향기를 피우는 참생명의 꿈틀거림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깊은 생각 속에 말건네오는 하느님의 마루[뜻]를 귀기울여 듣고 그것을 사람의 말로 잡아서 세우고 그 말을 써서 하느님의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말씀[말숨]의 살림살이를 해야 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 곧 하느님이다. 우리 생명은 목숨인데 목숨은 말씀하고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공자를 『논어』와 바꾸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생각이 끊이지 않고 말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숨이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을 뽑았으면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는 억지 마음은 버려야 한다. 죽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실을 뽑아라. 집을 지어라. 생각의 집, 말씀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라. 내가 가서 있을 집을 예비하는 것이다. 내가 가서 있을 집을 지어놓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거저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려 왔다. 실 뽑으러 왔다. 생각하러 왔다. 기도하러 왔다. 일하러 왔다. 말씀의 집을 지어야 한다.”
다석에 의하면 시작했다 끝이 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끝을 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낳아서 죽는 것은 몸이요, 죽어서 사는 것은 얼이다. 얼은 제나[몸나와 맘나]가 죽어서 하는 생명이다. 다시 말해 형이하(形而下)에 죽고 형이상(形而上)에 사는 것이다. 단단히 인생의 결산을 하고 다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개요 회심이다. 얼에는 끝이 없고 시작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삶이 하늘로부터 받은 바탈을 태우며 전체인 빈탕한데에로 돌아가는 참생명이다.
5. 생명은 바탈태우
1) 말숨과 우숨(얼숨)
이제 웋일름[천명(天命)]에 따라 자신의 바탈을 태워 말숨을 쉬면서 성령의 얼김을 우주에 펴차는 얼생명의 양태를 살펴보자.
다석에 의하면 우리말 ‘말’은 ‘마루’에서 나왔다. 하느님의 마루(뜻)라는 의미가 우리말 ‘말’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말은 하느님의 마루다. 하느님의 마루가 우리의 얼 속으로 들고날 때 우리 안에서는 생각의 불꽃이 튀게 된다. ‘말슴’은 그렇게 튀는 생각에 답하면서 하느님의 마루를 우리의 말로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의 마루를 세우기 위해 인간의 말을 쓰는 것이 ‘말씀’이다. 이렇듯 말숨을 쉰다는 것은 영원을 그리워하며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속에 타고 있는 참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다.
다석은 이 경우 속알 또는 바탈이라는 낱말을 즐겨 쓴다. 그리고 바탈이 ‘받할’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한다. ‘받할’은 ‘받’과 ‘할’이 모여 만들어진 글자로서, ‘받’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의미하고, ‘할’은 그 받은 것을 갖고 해야 할 바를 뜻한다. 따라서 ‘바탈’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으로서 살아가면서 실행해내야 할 바를 가리킨다. 그것은 동양사상에서 흔히 쓰는 성(性)에 대한 우리말인 셈이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우리의 속알, 바로 그 안에 새겨져 있는 하느님의 뜻이, 즉 성(性)과 명(命)이 이런 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말씀을 산다’ 또는 ‘말숨을 쉰다’는 것은 목숨을 쉬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목숨을 연명하며 육체적인 몸살이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말숨을 쉰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계속 이어나가는 문화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목숨의 차원에서 인간은 자연적인 삶을 이어나가지만, 말숨의 차원에서는 문화창조를 이어나간다. 그러기에 우리의 목숨은 말숨으로 바뀌어야 된다. ‘공자’가 ‘논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목숨으로서의 공자는 죽고 말숨으로서의 논어가 살아남아야 한다.
말숨살이는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늘의 뜻을 찾아 세워서 그 뜻과 일치해 살기 위해 몸살이 차원의 삶을 끝내고 뜻살이(얼살이)의 삶을 시작함을 말한다. 이것이 새로운 삶의 기본이다. 깨끗이 끝내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나를 끝까지 깨부수어 비우고 새로운 나를 시작하는 것이다. 몸으로서의 나를 끝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얼로서, 뜻으로서 나를 시작하여 채울 수 있다. 공자가 논어가 될 때 목숨이 말숨을 쉬고 목숨이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된다. 공자는 논어를 씀으로 인해 하느님의 말(마루)을 씀 속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우리는 누에에서 훌륭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누에는 몸살이로서의 목숨을 죽여야 고치라는 집을 지을 수 있다. 다석은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러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말숨(말씀)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숨 쉼은 영원을 사는 것이다. 말숨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요,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도 하다. 말숨(말씀) 쉬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는 것이다. 말숨은 우리 속에 타는 참의 불이다. 속에서 장작처럼 쓰여지는 것이 말숨이다. 참이란 맘속에 쓰여지는 것이다. 중용이란 우리 맘속에서 쓰여진다는 말이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생각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존재다. 하느님의 말숨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에 말숨을 쉬면서 우리는 몸이 아닌 얼로 숨을 쉬는 것이다. ‘얼’로 숨쉬는 한에서 말숨은 다른 말로 ‘얼숨’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한얼[우주생명]과 하나가 되어 쉬는 숨이다. 그러기에 얼숨은 또한 ‘우숨’(우주적인 숨)이다. 가장 큰 우숨은 절대생명과 하나 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초월해서 짓는 웃음[우숨]이다. 얼숨은 바로 존재의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사는 양상이며, 그 임무는 우주 안의 보이지 않는 한얼을 우주만물 속에 펴차는[우주만물에 펼쳐 채우는] 데에 있다. 다석은 유비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펴참이다’라는 말을 한다. 다석에 따르면, 우리는 가슴에 생명의 숨길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배(속)에는 얼뜻을 가지고 있다. 태양과 씨알이 하나가 되듯 우리의 얼나가 한얼을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씨알이 태양을 만나 바탈이 터서 자라 나무가 될 때 태양과 하나가 되듯, 우리의 속알(바탈)이 한얼을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도 나무가 될 수 있다. 다석은 이처럼 생명의 잎과 바탈의 꽃과 얼뜻의 열매라는 차원을 고루 헤아려서 인간의 참 생명의 길을 유추해낸다. 우리는 생명의 숨결을 받아 잎사귀를 키우고 우리의 바탈을 꽃피워 얼뜻의 열매를 맺는다.
2) 생명의 첨단 ‘이 제 긋’
다석은 우주적 생명을 이어받아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낱생명으로서의 나를 ‘긋’이라 즐겨 표현한다. 광대한 우주생명의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의 점에 불과한 나지만 내 안에 불타는 하늘의 일름[명(命)]을 깨달을 때 나는 하늘과 하나 되어 생명의 역사를 함께 써가는 얼나로 솟날 수 있다. 이렇게 몸생명을 깨끗이 끝내고 참생명의 역사에 동참하는 몸나로서의 나의 결단을 다석은 ‘가온찍기’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민족의 한 끄트머리 현대에 나타난 하나의 첨단이다. 나의 정신은 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긋을 찍는다. 가온찍기()이다. 이 한 긋(點)이 나다. 나는 한 끄트머리이며 하나의 점이며 긋수이기도 하다.”
다석은 긋과 관련지어 ‘이 긋, 제 긋, 이 제 긋’이라고 다양하게 표현하며 설명한다. ‘이 긋’은 가이 없는 무한 시간이 계속 이어져 내려와 지금까지 연속된 시간의 긋[끝]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주의 시작부터 이어 이어 내려오는 그 시간의 끝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다. 태극 이전 무극으로부터 이어내려 오는 그런 긋이다. ‘나’는 그 무한한 시간으로부터 이어져서 오늘에 이른 존재이기에 ‘이 긋’이다. 그러기에 이 긋은 시간줄, 생명줄이 이어져 내려온 끝을 말한다.
‘제 긋’은 제각각 자기의 긋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명의 시간이 계속 이어 이어 내려와 지금 여기 이 곳, 이 나라, 이 땅, 이 민족에서 각자의 제 긋이 된다.
‘이 제 긋’은 무한한 시간이 이어 이어 내려와 각자의 선택 없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에게서 이어져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긋은 시간의 긋[끝], 공간의 긋[끝]이다. 텅 빈 무한 공간에다 원을 그리고 그 원이 태극이라고 한다면(이것은, 그 밖은 무극임을 전제로 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 원 안의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한 점에 불과하다. 그것이 제 긋이다. 무한한 생명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 이 긋이고, 그것을 내가 이어받아 차지하고 있는 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 긋이 제 긋이다. 나의 ‘이 제 긋’은 150억 년이라는 태극의 역사 안에서 볼 때에 오래 살아야 백년 정도니, 그것은 그야말로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이 제 긋이다.
나의 긋은 무한한 시간과 공간, 즉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때-사이’와 가이 없는 ‘빔-사이’에 떨어진 한 방울 물과 같다. 그렇지만 그런 나와 마당을 싸돌아다니고 있는 한 마리의 강아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 하는 가온찍기의 역할 때문에 그렇다. 강아지 한 마리가 가지고 있는 ‘결’ 속에도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렇지만 강아지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강아지도 ‘때-사이’를 이어 여기까지 왔지만 강아지는 의식적으로, 주체적으로 그 사이를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때-사이’는 우주의 시작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고 ‘빔-사이’는 우주공간 밖까지도 벗어나 간다. 그러기에 인간은 사이를 잇는 존재다.
나에게서 이어지는 생명의 숨줄은 단순한 육체적인 목숨으로서의 숨줄만이 아니다. 우주의 시작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생명의 숨줄을 이어주고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생명으로, 숨으로 채우고 있는 것은 한얼이다. 바로 인간이 몸으로서의 나가 아닌, 이러한 한얼과 일치될 수 있는 내 안의 얼을 깨울 때, 그리하여 내 안에 있는 본래의 나를 찾을 때, 내 안에 있는 얼나로서의 내가 솟나(솟아 나) 얼나로 살 때가 바로 ‘가온’이다. 내가 나의 본바탈의 한가운데를 찍어 적중시키는 것이다.
다석은 가온찍기() 하는 인간을 ‘긋’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의 숨줄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나다. 성령은 나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숨줄인 영원한 생명줄을 붙잡는 것이다. 붙잡은 생명줄이 이 ‘긋’이다. ‘긋’은 숨줄 긋이다. 이 숨줄 긋을 붙잡는 것이 가온찍기()이다.”
나는 가고 가고 오고 오는 시간의 영원함을 여기서 만나는 것이다. 단순히 몸으로서의 내가 자신을 꽃피운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주 전체 진화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뜻을 읽어낼 수 있고 그 뜻과 일치하는, 그 뜻 속에 품어져 있는 얼과 나를 일치시키는 것이 가온찍기다. 다석은 가온찍기를 몸과 맘의 차원보다는 뜻과 얼의 차원에서 강조한다. 다석은 우리말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사이에-있음[사이존재]으로서의 인간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가온찍기’로서 설명한다.
“나라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자각하고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맞추듯이 곧이 곧고 신성하고 영특한 영원한 나의 한 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진리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이다. 나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긋이 나타난 것이다. 기역(ㄱ)은 니은(ㄴ)을, 그리고 니은(ㄴ)은 기역(ㄱ)을 서로 높이는데 그 가운데 한 점을 찍는다. 기역과 아오(․)라는 한 점과 합치면 ‘가’가 되어 가고 영원히 간다. 아오(․)의 오와 니은이 합치면 ‘온’이 된다. 가고 가고 영원히 가고, 오고 오고 영원히 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가온찍기()’야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찰나 속에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곧이 가온찍기()가 인생의 핵심이다. 그러나 깨닫는 가온찍기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끝끝내내 표현해보고 나타내보고 나타내 보여야 한다. 내가 내 속알을 그려보고 내가 참 나를 만나보는 것이 끝끝내내이다.”
‘끝끝내내’와 관련지어 다석이 즐겨 쓰는 표현 가운데 ‘깨끗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끝까지 깨어 부숴 자기 자신을 없애 버린다는 뜻이라고 다석은 풀이한다. 또는 몸으로서의 나를 깨서 몸나와는 끝장을 보라(끝내라)는 뜻이라고 한다. 몸으로서의 나는 언젠가는 끝이 난다. 나의 몸은 내가 모르는 사이 시작되었고 그 끝을 향하여 간다. 육체의 삶이란 것은 이렇게 시작되고 그렇게 끝이 난다. 하지만 얼나는 그와 같이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얼로서의 나는 거꾸로 먼저 끝을 내어야만 한다. 몸나가 끝나는 그때부터 얼나가 시작된다.
3) 얼나의 하루살이
다석은 ‘사이에 있는’ 인간을 그 사이에 따라 네 가지 차원으로 구별하여 다룰 수 있다고 본다. 빔-사이를 차지하고 있는 몸으로서의 ‘몸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 사람-사이를 오고가는 마음으로서의 ‘맘나’도 나의 전부가 아니다. 시간 속에 살며 때-사이를 잇고 있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제나[뜻나]’도 나의 전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늘과 땅 사이를 잇고 있는 ‘얼나’로서의 나가 참나다. 얼로서의 나가 우주의 얼인 ‘한얼’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다석은 노장사상과 무속종교가 너무 몸나에만 관심을 보였다면, 불교는 너무 맘나에만 치중하였고, 유교는 너무 맘나의 공동체인 ‘가(家)’에만 신경을 쏟았고,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역사관 속에서 제나의 구원에만 유의하였다고 지적한다.
다석은 이 모든 ‘나’의 차원들을 나름대로 다 살리면서 궁극적인 참나인 ‘얼나’로서의 삶에 정진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며 ‘몸성히’, 마음을 놓아 보내며 ‘맘놓이’, 자신의 속알[바탈]속에 새겨진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 뜻을 태우며 [= 바탈태우, 뜻태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온 우주, 모든 빔, 모든 사이 속에 없이 계시며 모든 생성소멸과 변화를 주재하는 하느님의 성령인 한얼과 소통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살리고 섬기며, 자신을 나누며 비우는 우주적 ‘살림살이’를 사는 우주인이 될 것을 다석은 우리에게 조용하게 이른다.
하늘의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얼나’는 ‘바탈태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내 안에 주어져 있는 뜻(바탈), 속알을 태워야 하는 것이다. 나 혼자만 잘 살자고 할 것이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문화와 세계평화, 지구와 우주를 위해서 내가 받은 바탈과 속알, 내 안에 새겨져 있는 깔, 꼴, 결을 찾아 태워서 모든 공동체가 한얼을 품을 수 있도록 살라는 것이다. 무한 경쟁 속에 무한 소유를 부추기며 무한 소비를 조장하면서 욕망을 고무풍선처럼 한없이 키우고 있는 현대인에게 하나뿐인 삶의 터전인 지구가 쓰레기통과 도살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 인간이 다석의 가르침처럼 얼나로서 살림, 섬김, 비움, 나눔의 우주적 살림살이에 동참한다면 이 지구는 아직 희망이 있다.
얼숨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하루살이 삶’이다. 그러한 삶을 대표적으로 산 사람이 바로 다석이다. 다석은 자신의 나이를 몇 살이라 표기하지 않고 몇 날을 살았는가 날수를 세어 말하였다. ‘하루살이’는 말 그대로 하루를 사는 살이를 말한다. 다석은 칠성판에서 자고, 먹고, 읽고, 사색하고 사람들을 맞으며 생활하였다. 새벽에 칠성판에서 일어나 하느님께 하루를 새로 주심에 대해 감사드리고 냉수마찰을 하였다. 다시 그 칠성판 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가부좌를 하고 동서양의 경전들을 읽으며 사색하였다. 그리고 저녁 한 끼니만을 들었다. 다석(多夕)이라는 호도 그저 많은 저녁이라는 의미다. “나의 저녁은 그저 많을 뿐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저녁은 영원하다.” 밤이 되면 다시 칠성판에 누우면서 “이제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며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다석은 잠자리에 들었다.
다석은 예순다섯이 되던 해에 “나는 내년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선생님의 말씀도 제대로 적어놓은 것이 없는데 돌아가신다니 이 무슨 청천벼락 같은 말씀이냐며 속기사를 동원하여 다석의 강의를 기록하도록 시킨다. 이렇게 하여 다석어록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이라는 책이다. 이것이 다석의 유일한 강의록이다. 그런데 1년이 지났는데도 다석이 살아있으므로 사람들이 놀라서 물었다.
다석은 “나는 이미 몸으로는 죽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를 산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일년 뒤의 삶은 목숨이 아닌 얼숨을 의미한 것이었다. 다석은 하루를 ‘할우’라 표기하기도 하였다. ‘할’은 무엇을 할 것임을 말하고 ‘우’는 ‘위’를 가리킨다. 우리의 하루는 끊임없이 한얼에게로 올라가는 ‘할우’가 되어야 하는 그런 하루살이를 위한 ‘하루’인 것이다. 다른 말로 그것은 얼생명을 사는 ‘얼살이’다.
4) 식사는 장사며 제사
다석은 얼나로서 얼살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탐욕과 성냄 그리고 음욕이라는 세 가지 못된 욕망의 뿌리를 근원부터 뽑아버리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25년간의 결혼(結婚)을 해혼(解婚)으로 풀고, 40여 년간 금욕생활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식사에 대한 그의 생각이 독특하고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기에 그것만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다석은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였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 그것이 동물이냐 식물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 모두 생명체다.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서 먹는 식사라는 것이 다른 생명체들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따지고 보면 매 끼니가 장례식인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죽이고 있다. 그러기에 다석은 “식사는 장사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가 이 지구 위에서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장례식을 될수록 적게 지내야 한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다석은 하루 한 끼니만[일일일식(一日一食)] 들었다. 그러면서도 다석(1890〜1981)은 91세까지 장수하였다.
하루 한 끼니만 먹을 때 나머지 두 끼니때 나는 내 몸과 내 살을 먹는 셈이 된다. 그것은 내 몸을 제물로 바치는 산 제사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 끼씩 먹는 일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다석은 식사가 곧 제사라고 말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으면 그것이 피가 되고 그 피는 뜻이 있어서 위로 올라가니, 향불 모양으로 사상을 피워 올리는 것을 먹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도록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바울은 너희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성전인 줄 아는 사람만이 능히 밥을 먹을 수 있다. 밥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 속에 계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밥을 먹는다는 것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다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밥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자기를 바쳤는데, 이때 ‘바쳤다’는 말은 밥이 되었다는 말이다. 밥이 되었다는 말은 밥을 지을 수 있는 쌀이 되었다는 의미다. 쌀이 되었다는 말은 다 익었다는 것이다. 성숙하여 무르익은 열매가 된 것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무르익는 것이다. 제물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 완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이 아니고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
다석에 의하면 인생의 목적은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 밥을 먹는 것은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수많은 사람의 덕으로, 대자연의 공로로 주어져서 먹는 것이다. 밥이 되기까지에는 태양빛과 바다의 물과 그 밖의 온갖 신비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밥은 우리가 거저 받는 하느님의 선물인 줄로 알아야 한다. 인생뿐만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에게 바쳐지기 위한 제물이다. 일체가 밥이다. 다석은 인생이란 밥을 통해 우주와 세상이 얻는 영양은 무엇일까 묻는다. 그것은 곧 말씀이라고 답한다. 인생이란 밥에는 말씀이 있다. 성령의 말씀이 있다. 온 인류를 살리는 우주의 힘이 되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다석에 의하면 인생은 짐승처럼 자기의 육체를 바치는 밥이 아니다. 인생은 밥을 먹고 육체를 기르고, 이 육체 속에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밥인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존재다. 인생이 제물이 되는 것은 육체적 제물이 아니다. 영적인 제물이다. 인생이 제물이 되는 것은 말씀이지 목숨이 아니다. 목숨은 껍데기요, 말씀이 속알이다.
6. 없이 계신 하느님, 없이 살아야 하는 인간
서양사람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개념 틀은 ‘있음[존재]’인데, 우리에게는 그 있음보다 훨씬 더 위에 ‘없음[無․空․虛]’이라는 더 큰 개념의 틀이 있다. 그러기에 그들과 우리의 이해의 지평은 다르다. 없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성으로는 할 수 없는) 없는 것에 대해 얘기를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분명 그런 이야기들은 말이나 개념으로 명확하게 잡을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 차원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만 이해된다. 무의 경험, 없음의 경험, 빔의 경험을 한 사람은 있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있다.
다석은 우리의 있음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잡을 길 없는 절대 공간과 무한 시간을 이름할 수는 없지만 억지로 이름하여 한늘(절대 공간인 ‘한’ + 무한 시간인 ‘늘’), 하늘, 한아(한 ․), 하나, 한얼, 하느님, 하나님, 한얼님, 한 나[大我], 한웋님이라 불렀다. 다석에게는 이러한 온전한 것, 깨지지 않은 것,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 어떤 것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신적인 것이다. 무한한 시간을 다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저 침묵의 끝을 알길 없는 어두운 우주 공간이, 무한히 뻗어 가는 바닥이 없는 검푸른 심연의 푸른 창공이, 지나온 역사와 앞으로 닥쳐올 미래의 사건까지도 다 자신의 영원한 고요와 적막 속에 내려다보고 있는 저 하늘이 성스러운 것이며 전형적으로 신적인 것이다. 그러한 깨끗한[= 모든 끝을 끝까지 깨부수는] 거룩한 신적인 ‘있음’은 유한한 있음의 관점으로 본다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다석은 이러한 하느님의 있음을 ‘없이-있음’이라고 이름한다.
없음이 일으키는 바람에 얻어맞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러한 없이 있음을 느끼며 깨닫는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지성으로도 잡을 수 없고 이성으로도 알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시각으로 그 없음을 알아 볼 수 있는 얼의 눈이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은 이 독특한 없이-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석은 그러한 없이 있는 텅빔, 빈탕한데가 절대생명이며 하느님이며 성스러운 존재, 거룩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없이 살았다.
다석을 공부하면서 글쓴이가 나름대로 끄집어낸 영성적 가치관은 살림, 섬김, 비움, 나눔의 가치관이다. 다른 말로 ‘살림살이’의 영성이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살림은 생명사랑, 섬김은 하느님사랑, 비움은 자연사랑, 나눔은 이웃사랑이라 할 수 있다. 이 네 가지의 가치를 우리의 삶 속의 가치로 승화시켜 생활할 때 우리의 지구는 희망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존재하는 모든 것과 사이좋게 사이를 나누며 사는 ‘지구살림살이’이다. 빔-사이, 사람[몬]-사이, 때-사이 그리고 하늘-땅 사이를 사이좋게 나누며 사는 생활이다. 사람은 이 사이를 이어주어야 하는 존재다.
사람은 살림을 알고 살림을 살아야 하는 살림지기다. 우리말 ‘생명’에는 살아야 한다는, 살려야 한다는 하늘의 명령이 간직되어 있다. 우리에게 생명체는 태양의 힘을 받아 땅을 뚫고 솟아나서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모든 것들이 해당된다. 생명이라는 낱말 자체가 하늘의 명을 받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 속에 있는 한얼과 일치하여 모든 것 속에서 한얼(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 ‘얼나’로서의 인간의 사명이다.
다석의 말대로 얼나로서 참생명을 사는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식사는 장사며 제사”라는 다석의 말이다. 이 정신을 이어받는다면 우리는 먹는 행위에서부터 생명사상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들은 생명체들이며 이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 꼭 필요한 양만을 먹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생명사랑과 더불어 자연[생태]사랑을 함께 실천할 수 있다. 우리가 일 년에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우리나라에서만 십수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것을 줄여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생태(환경)사랑과 더불어 이웃사랑[나눔]도 실천할 수 있다.
둘째, 우리는 마더 데레사의 “나눔 없이 평화 없다”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 원인은 결코 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지구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64억 인구가 모두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먹고 남아서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것을 남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위 선진국의 경제논리다. 그런데 나눔이 없는 한 세계평화를 기대 할 수 없다. “식사는 장사다”의 정신으로 한 끼니 나누는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다석처럼 하루 한 끼니만 먹을 수는 없다하더라도 먹는 것을 조금만 줄여 그 줄인 부분을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눠줄 수는 있을 것이다.
셋째, 다석의 가온찍기 하루살이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소유 중심에서 나눔과 비움 중심으로 삶의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나눔을 통한 비움, 비움을 통한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이 제 긋’으로서 이어 이어 나에게까지 이어져온 내 생명의 ‘긋’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한얼의 뜻을 깨달아 한얼과 더불어 우주 또는 지구 살림살이에 동참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없이 살며 이 몸을 나누고 비우다 종국에는 텅빔 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몸나를 끝내고 얼나로 솟나야 한다. 나는 매일매일 자신을 비우고 ‘할 우(하루)’를 실천해야 한다. ‘한웋’인 위로 올라가려 노력해야 한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나눔과 비움의 한 방법으로 장기기증, 시신기증을 할 수 있다.
넷째, 다석의 사상을 이어받아 함석헌처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것을 명심하고 실천해야 한다. 생각에는 ‘드(되)는 생각’, ‘하는 생각’, ‘나는 생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드(되)는 생각은 하지만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체적으로 창의적으로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 훈련을 많이 하여야 한다. 하이데거는 생각에는 ‘셈 생각’과 ‘뜻 생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셈 생각은 많이 하지만 뜻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일름, 한얼의 숨결, 존재의 뜻을 읽어내어 거기에 응답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그 뜻을 찾아나갈 때 그 뜻에 대한 대답이 ‘나는’ 생각이다. 생각하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침묵, 명상, 생각 속에 한얼과 일치하는 삶을 생활화해야 한다. 진리 찾기와 참나 찾기를 함께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석은 하느님의 없이 계심 같이 그렇게 없이 살 것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가르치는 것은 모두 다 제일 마루[종(宗) = 하느님]로 가라고 가르치는 것이지요. 턱 깨닫고 나가는 시간이 있어야 해요. 학(學)은 각(覺)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교(敎)는 각(覺)으로 성불(成佛)하면 깨끗해집니다. 깨끗은 깨끝입니다. 상대계가 아주 끝이 나도록 깨트리면 진리인 절대가 나타납니다. 참 나를 깨닫는 것이지요. 깨끝이면 아멘입니다. 다 치워야지요. 없도록 치워야 해요, 아직도 덜 치워 남아 있으면 덜 없지요. 덜 없으면 더럽지요. 덜 치워 덜 없는 것이 더러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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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은 웋일름을 따르는 몸사름. 다석 유영모의 생명사상의 영성적 차원>,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의 생명사상 재조명』(오산창립100주년기념 학술세미나 발표집) (2005년 11월 28일), 5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