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역사철학 해설
-. 헤겔은 누구인가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의 부친은 법원의 관리로 일했고, 집안에 교사나 목사로 활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모친의 학구열이 강해서, 헤겔은 3세 때부터 독일어를 배웠고, 5세 때부터는 라틴어와 이후 그리스어를 배웠다.
헤겔은 일찍부터 공부한 내용을 기록하는 습관을 가졌고, 이런 습관은 평생토록 이어졌다.
1788년 집을 떠나 튀빙겐에서 대학을 다녔다. 이 시기 역사적으로 많은 일이 일어나 정치,사회적 격변이 일어났다.
프랑스대혁명은 자연스럽게 헤겔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헤겔은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는데, 대학에서 셀링(1775~1854)과 휠덜린(1770~1843)을 만나 튀빙겐의 삼총사가 된다.
헤겔보다 5살이나 어린 셀링은 16세에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할 만큼 뛰어났고, 헤겔보다 먼저 철학으로 유명해졌다.
휠덜린은 철학적 주제를 주로 다루는 시인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정신병을 앓다가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 이웃 독일은 기대감과 혼란이 심했고, 영국은 비교적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유럽 대부분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서 흥분했다.
"생생히 밝아오는 새벽이 황홀하도다. 젊다는 것 또한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도다." - 윌리엄 워즈워스.
프랑스혁명은 영주와 농노로 구성되는 봉건적인 구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었고, 그것은 자유를 뜻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란 신분제도가 폐지되고, 보통 사람들이 당당한 주인이 되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을 '영광스러운 새벽'이라고 부르며 젊은이들과 '라마르세예즈'를 불렀고, 실러(1759~1805)는 <환희의 송가>를 외쳤다.
라마르세예즈는 마르세유의 행진곡이라는 뜻으로, 프랑스대혁명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뜻 깊은 노래로 오늘날 프랑스 국가로 불려진다.
"가자, 조국의 아들들아. 영광의 날이 왔다. 압제에 맞서 피 묻은 깃발을 들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주변 군주국들은 혁명의 불똥을 염려해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때 마르세유에서 온 의용군들이 파리로 행진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프랑스 왕정을 거부하는 혁명의 노래가 되었다.
지금도 이 노래는 사람들이 정부를 비판하거나, 노동자들이 권리를 주장할 때도 많이 부른다.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시인 실러의 <환희의 송가>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가사가 되었다.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천국의 딸이여. 우리는 불에 취해, 그대의 신성한 천국에 발을 디디노라..."
프랑스혁명은 헤겔에게 역사와 철학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역사의 중요성을 깊게 경험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대학 졸업 후 헤겔이 스위스에서 가정교사로 일할 때, 셀링은 23세에 교수가 되어 이미 국가적인 명성을 얻으며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휠덜린도 시인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해 있었다. 헤겔은 휠덜린의 도움으로 프랑크푸르트에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옮길 수 있었다.
1801년 셀링이 예나대학에서 철학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헤겔은 마침내 예나로 가서 사강사 자리를 얻었다.
1806년 10월 12일 밤 독일을 점령하기 위해 나폴레옹이 예나를 공격했다. 다음날 정복된 도시 예나로 행군해서 들어오는 나폴레옹을 보았다.
이때 헤겔이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세계정신으로 보았다.
"나는 말 위에 탄 세계정신 나폴레옹이 군대를 사열하면서 도시를 통과하는 것을 보았소. 실제로 그 위대한 존재를 보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경험이오. 그 존재는 말을 탄 채로 한 점을 응시하면서 세계를 장악하고 세계를 지배하고 있소." ☞
헤겔에게 나폴레옹은 침략자가 아니고, 역사를 발전시켜서 한 걸음 더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세계사의 위대한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훗날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천재가 평범하게 파멸하는 비극적인 일이다."
이듬해인 1807년 <정신현상학>을 출판했다.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군대에 패하자, 대학도 폐쇄되어, 바이에른의 뉘른베르크의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 및 교장 자리를 얻어 9년 동안 일했다.
이 시기인 1811년 41세의 헤겔은 절반 정도 나이의 어린 신부와 결혼했고, 1812~1816년에는 <논리학> 3권을 출간했다.
이를 계기로 베를린,하이델베르크 등에서 철학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베를린大에서 망설이는 동안 헤겔은 하이델베르크大로 갔다.
이듬해인 1817년에는 베를린에서 초청장이 와서 1818년 베를린大 교수가 되었고, 여기에서 여생을 보냈다.
베를린大에서 헤겔이 한 강의는 역사철학,종교철학,미학,철학사 등이었다. 1830년에는 베를린大 총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베를린大는 헤겔이 남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헤겔의 친구이자 철학계의 선배인 셀링을 초청했다.
셀링은 헤겔이 예나에 있던 때에 쓴 책에서 자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헤겔과는 오래 전에 절교한 상태였다.
게다가 학문적 성과로 역전되었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설욕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프로이센의 문화장관은 셀링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심어진 범신론의 씨앗을 없애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시대는 셀링에게 호감을 보여 주지 않았다. 셀링이 주장하는 신비주의에 대해 학생들은 실망감을 노골적으로 보이면서 떠나갔다.
헤겔이 죽은 후 제자들은 헤겔의 강의노트를 편집해 책으로 출간했다. <역사철학강의> <미학강의> <종교철학강의> <철학사강의> 등이다.
-. 헤겔의 역사철학 개요
역사의 주인은 정신이다. 정신은 자유를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고난과 불행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길을 간다.
우연한 사실도 그 안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관계로 묶여 있다. 결국 역사는 이성의 힘으로 앞으로 나가면서 자신의 꿈을 완성한다.
헤겔의 역사는 과거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고, 사람이 주체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발전하는 역사다.
역사의 발전은 자유의 성취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로 판단할 수 있다. 자유의 성취를 위해 절대정신인 이성은 인간을 사용한다.
-. 역사철학강의는 어떤 책일까?
<역사철학강의>는 대학에서 강의를 위해 쓰여진 것이었다.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헤겔(1770~1831)의 사후 한참 뒤인 1837년의 일이다.
1822~1823년 사이에 베를린大에서 역사철학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의 필기노트를 에두아르트 간스가 종합한 것이다.
헤겔의 아들 칼 헤겔은 1840년에 <역사철학강의>를 보완해서 다시 출판했다.
철학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사물과 세계를 제대로 알아보자는 생각에서 나온 학문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복잡하게 얽혀 움직이는 세계의 근본원리와 질서를 깨닫는 것이다.
역사철학이란 역사의 생성, 역사의 발전, 역사의 의미를 어떻게 인식하고 기록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다.
헤겔은 역사적 사실들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원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밝히는 것이 <역사철학강의>의 목적이다.
<역사철학강의>의 구성은 서론에서 역사의 종류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서론 - 근본적인 역사, 반성적인 역사, 철학적인 역사.
1부. 동양세계.
2부. 그리스 세계.
3부. 로마 세계.
4부. 게르만 세계.
서론에서 헤겔은 세계의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정신, 즉 이성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절대정신이 자기 자신을 펼쳐 나가는 과정이고, 절대정신이 살고 있는 집이다."
1~4부까지는 절대정신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 준다.
1부는 중국,인도,베르시아 등 동양의 여러 나라의 사례를 근거로, 아직 정신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단계로서, 어린아이 단계라고 말한다.
이러한 나라에서는 왕 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2~3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소수가 자유를 누리면서 역사는 조금 더 발전하는데, 이 시기를 각각 역사의 청년기와 장년기로 비유한다.
4부 게르만 세계는 종교개혁으로 자유로운 정신활동에 따라 정신의 본성을 회복해 완성된 역사를 갖는다고 했다.
여기서 게르만은 독일,스칸디나비아,네덜란드,영국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게르만 세계는 노년기에 해당하는데, 노년기는 정신이 완전히 성숙단계에 이르러 자신을 마침내 완성하는 시기를 말한다.
이 책에서는 역사의 발전 기준을 정신의 성숙으로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느냐에 따라 정신의 성숙을 판단하고 있다.
역사는 자연처럼 단순히 때가 되면 성장,순환하는 행위를 하지 않고,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계속해서 성장,발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가 언제나 체계적이고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는 이러한 역사철학에 대해 모두가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헤겔은 역사와 정신의 개념을 결합하면서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근대국가에 대한 이념을 깊게 했다.
역사의 주인인 정신은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가지고 스스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역사를 창조해 나간다.
이러한 역사발전 과정은 국가의 형태,제도,법률 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헤겔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국민이 얼마만큼의 자유를 누리고, 사회는 얼마나 좋은 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국민들은 얼마나 성숙한 도덕생활을 하느냐가 곧 역사발전의 기준이다.
즉 국가는 국민을 잘 보호하고, 국민은 국가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사익을 양보한다면 그만큼 절대정신이 발전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은 독일을 그런 나라라고 보았다.
<역사철학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절대정신, 이성, 자유이다.
절대정신이 완전한 자유에 도달해서, 자유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면 역사도 완성된다.
정신이란 생각하고 성찰하는 능력으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절대정신은 개인의 정신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원리 또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목표를 가지고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절대정신이다. 보편적이고 자유롭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역사의 영웅들은 절대정신의 명령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은 나폴레옹을 '말을 탄 정신'이라고 했다.
-. 헤겔 이전의 역사철학자 - 칸트, 헤르더.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사실들은 시간과 장소가 달라진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할 당시에는 중요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것이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또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이렇듯 역사적 사실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또한 다른 분야의 사실들은 직접 조사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검증할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에는 이러한 방법을 쓸 수 없다.
역사철학은 19세기 이전까지는 독립적인 분야가 아니었다. 역사철학은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하나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역사 전체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면서 전체적인 연관성을 밝혀 내려는 학문이다.
역사철학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상당히 관심을 받았던 반면,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영국은 경험철학의 영향으로, 경험으로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에게 역사철학은 너무나 막연해서 실제 역사와는 아무 상관없이 생각 속에서 만들어지는 학문으로 보였다.
프랑스는 자연과학적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 발전했기 때문에, 역사철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다.
데카르트처럼 프랑스인들은 진정한 지식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칸트. 칸트(1724~1804)가 산책 시간을 못 맞춘 일이 평생에 두 번 있었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그랬고, <에밀>을 읽으면서 그랬다.
칸트는 역사철학에 대한 책을 낸 적은 없지만, 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생각이 여러 철학논문에 포함되어 있고, 역사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역사철학의 대표자인 헤르더와 헤겔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헤르더는 칸트의 제자로, 역사철학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역사철학에 대한 칸트의 사상은 두 논문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추측해본 인류역사의 기원>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헤르더의 역사철학서에 관한 서평인 <헤르더의 인류역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들>에도 나타나 있다.
칸트는 자연과 인류의 역사를 구분하고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인간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자연의 역사는 신의 작품이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시작되고, 자유의 역사는 인간의 작품이므로 악에서 출발한다." - <추측해본 인류역사의 기원>.
인류의 역사는 사람들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나 점점 이성의 능력이 커지는 것에 따라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다.
사람이 자연상태에 있다는 것은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선악의 구별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사람이 이성을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자유의 역사가 악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자유가 악한 일과 관계있다는 것이 아니고, 악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의미이다.
자신이 직접 알려고 하는 마음이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기 스스로'가 굉장히 중요하다.
남의 명령에 의해서, 또는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어떤 결정을 하거나 행동한다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판단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류의 역사는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고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엔 자연상태에서 출발해 점차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 가며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자연상태를 벗어났다.
자연은 본래 있는 것으로, 인과법칙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목적의 개념을 가지며, 그의 이성에 의해서 목적의 체계를 지닐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이 지구에 있어서 창조의 최후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 <판단력 비판>.
인간은 자연의 창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세울 뿐만 아니라, 목적의 전체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을 통해 비로소 자연은 창조를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이 만들어 낸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목적을 세우는 능력의 비밀은 바로 이성이다. 즉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능력이다.
이성이 주어진 인간은 인간 뿐 아니라 자연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성이라는 것은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 전체를 생각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한 부분이나, 어느 한쪽만을 생각하거나 대변하는 것은 이성의 뜻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
이성은 자신의 생각에 의해 움직인다. 강제에 의한 일은 오히려 자신이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봐야 한다.
즉 이성은 자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이성적인 사람의 태도다.
"인간이 이성에 의해 인류 최초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낙원으로부터 나온 것은 결국 한갓 동물의 야만성으로부터 인간성의 상태로, 또 본능으로부터 이성의 인도함으로 옮겨간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는 자연의 보호상태로부터 자유의 상태로의 이행이다." - <추측해본 인류역사의 기원>.
고생이 필요없고 걱정없이 살 수 있는 낙원에서 사는 조건은 단 한 가지 복종 뿐이었다. 인간은 왜 그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고생길을 택했을까?
복종 대신 자유를 원했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직접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책임도 따랐다. 때론 걱정되고 무섭기도 하고 귀찮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결정한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 이성은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로운 의지로 움직이지만, 여기에는 책임이 따른다.
따라서 자유는 '마음대로'라는 뜻이 아니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강요없이'라는 뜻으로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의 의지가 밖으로 표현된 것이 행동이고, 이러한 행동이 쌓여서 모아진 것이 역사다.
"인간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또 인간 자신이 본능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을 통해 창조한 행복과 완전함 이외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자연이 의도하는 것이다." -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칸트는 인간 이성의 주체성과, 모든 사람의 행복이 역사의 목적이지만, 또한 자연도 똑같은 것을 바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의 꿈은 평화로운 시민사회를 세우는 것이다. 즉 역사의 목적은 인류 전체가 함께 악을 물리치고 사이좋게 사는 것이다. → 낙관적 계몽주의자.
이성이라는 말 속에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포함한다. 행동하지 않는 이성은 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