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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노장철학

에코맨21 2020. 4. 2. 10:33

1부. 노자와 장자, 현대의 철학자들     
 
1. 노자는 은둔의 철학자인가?

 1) 노자는 은둔의 철학자나 反문명론자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문명론자이다.
 춘추전국시대 백가쟁명의 다양한 사상 중에서도 특히 도가와 유가는 훗날까지 중국철학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두 사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노자는 은둔철학자로 알려졌지만, 장자를 포함해서 중국사상사에 기록된 철학자들 가운데 현실을 도외시한 철학자가 과연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노자의 철학이 여러 은둔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노자의 철학이 은둔철학은 아니다.
 공자는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당시의 현실을 天下無道한 혼란으로 파악했다. 변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반면 노자는 당시의 현실을 혼란이라기보다는 변화로 파악했고, 변화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의 철학에서 道의 운동력으로 反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공자와는 다른 형태의 문명을 제시하는 노자
 親親과 無親.  공자는 당시 사회의 변화를 혼란으로 규정하고, 그런 혼란을 극복하고 사회질서를 위해 西周 사회를 이상적 모델로 상정했다.
 西周 사회의 禮를 실현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復禮의 구체적 내용은 바로 西周 시대의 禮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周나라는 가부장적인 종족지배, 즉 종법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西周 사회를 유지시키는 기본 제도로 정착했다.
 혈연적 유대의 개념이 周나라에서는 국가 개념과 일치한다. 혈연적 유대의 이익이 곧 국가의 기초였던 것이다.
 이런 周나라의 사상은 공자를 이어 맹자의 이론체계에까지 잘 계승되어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모든 덕목의 기초나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모두 親을 가장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나아가 친한 사람을 친하게 여기고 신임하는 것을 인간성의 발현으로 이해하고, 그런 정신을 유지해야 가치있는 사회정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양을 훔친 아비를 고발하지 못하고 숨겨 주는 자신의 마음가짐을 가장 기본적인 심성으로 본다.
 정직도 親親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 아래에서라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유가에서는 親이 모든 덕목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도가 철학의 특징은 天道에서 人道를 연역해 내는 사유구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유가가 형이상학 체계와 관계없이 인간사를 해결하려는 것과 달리 노자는 천도와의 유사성을 확보하는 것을 인간행위의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道를 본받아서 하는 행위를 최고로 보는 노자 철학체계에서 親親이 덕목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자는 無親을 주장했다.
 공자는 신분질서 붕괴로 야기된 혼란을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했는데, 그 방법은 西周의 신분의 구분을 그대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와 대립되는 노자는 無親을 주장하여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禮와 非禮.  周나라는 혈연적 유대를 기초로 해서 직분과 신분을 나누어 통치했는데, 귀족들 사이의 이런 사회규범을 禮라고 한다.
 禮는 본래 원시적 씨족 공동체 시대부터 습속과 관례로 전승되어 온 행동규범을 말한다. 周의 통치는 禮를 국가의 근본 뿌리로 여겼다.
 禮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이해는 공자를 거쳐 순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적용된다.
 구분과 질서를 강조하는 禮에 대해 노자나 장자는 사뭇 비판적이다.
 노자는 인간의 자율성에 의지하기보다는 일정한 내용으로 규범화한 禮의 편협성,제한성,경직성을 공격한다.
 노자가 보기에 禮는 우주적 차원의 순수한 본성이 몇 단계 파괴된 후 나타나는 그다지 수준 높은 덕목이 아니다.
 禮는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보장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실현하기보다는 경직된 태도를 지키게 하는 강제성만 드러나게 할 뿐인 것이다.
 禮가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는 기능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충성과 신뢰를 겉으로만 지키는 듯하다가 결국은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分과 非分.  공자가 말하는 天下無道의 내용은 신분질서의 붕괴이고, 이는 경제적으로 힘을 얻은 피지배층이 신분상승 욕구를 분출하는 모습이다.
 군자와 소인으로 정착되었던 西周 사회는 두 계층으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
 공자 시대의 지배층인 세습귀족은 이들의 시도에 대해 당연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군자는 조화를 꾀하지 똑같게 하려 하지 않으며, 소인은 똑같게 하려고 하지 조화를 꾀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은 신분의 구분과 신분질서의 교란에 대한 공자의 인식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비지배층의 신분상승 욕구를 반대한 것이다.
 맹자는 신분의 구분을 天下之通義라고 하여, 이러한 인식에 보편성을 부여한다.
 순자는 分이 인간에게만 있는 능력이자 보편성이라고까지 규정한다.
 반면 노자는 변화를 강조하고 分을 부정한다. 노자 철학에서 변화와 관계는 아주 중요한 핵심 관념이다.
 즉 어떤 것도 그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반대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세계의 이런 원리를 노자는 道로 표현하는데, 道의 핵심 내용은 반대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력, 즉 反이다.
 노자에 의하면 親이나 禮는 신분질서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우주 운행원리의 기본 내용인 反에 역행하는 것이다.
 正名과 非名.  공자의 正名 사상은 그의 역사관에 근거하고, 기본적으로 사회질서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본래적 의미의 명분회복을 정치행위의 제일 요건으로 삼은 것이다.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서는 모든 이름이나 명분, 다시 말해 신분은 그 신분에 정해진 고유한 분수를 지켜야 했다.
 즉 周禮에 따라 그 이름에 본래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요청들과 일치해야만 했다.
 이렇게 공자에게 名은 변동될 수 있는 의미를 가진 임의의 기호가 아니라, 그 안에 周禮에 의해 규정된 불변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반면 노자는 어떤 명분이나 명칭도 고정불변의 것으로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名可名 非常名.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된 名이 항상 그 名의 진정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노자의 철학적 주제는 어떻게 하면 우주적 원리를 이해해서 그것을 그대로 인간사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공자처럼 신분의 명분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많지 않다.
 노자에 의하면 사회질서는 고착된 신분의 구분을 통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고정적인 명분을 고집하지 않고 변화를 수용하는 道의 질박함을 본받음으로써 더욱 잘 유지될 수 있다.
 
 3) 노자의 철학이 응축되어 있는 道
 노자의 道論은 형이상학적 내용이지만, 자신의 정치적 패러다임이 담겨 있다.
 老莊이 말하는 道는 근원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형식을 표시하는 일종의 가장 기본적인 보편원칙 내지는 보편원리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道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그것이 항상 道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된 名이 항상 그 名의 진정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노자는 道나 名이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그저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이는 道가 본질적인 내용을 지니는 규정된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념화나 정의가 불가능함을 나타내고 있다.
 개념화란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되는 고유한 성질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 성질을 본질적 내용으로 규정하는 작업이다.
 노자는 자신의 철학체계에서 道를 그런 본질적 내용을 지니고 있는 어떤 것으로 보지 않는다.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無는 이 세계의 처음 상태를 가리키고, 有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노자는 有와 無를 기본적인 한 쌍의 범주로 제시해서, 보편적 의미에서 세계의 존재형식을 설명하려 한다.
 세계는 有와 無, 難과 易, 長과 短, 高와 下, 音과 聲, 前과 後 등의 범주들이 상호 관련되어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우주의 지배원리라는 것이다.
 道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그 작용은 무한 광대하다.
 노자가 보기에 세계는 有와 無를 대표로 하는 대대 범주가 마치 새끼줄 모양처럼 서로 꼬여 이루어진다.
 세계가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세계는 그렇게 이루어진다는 원리를 道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有와 無는 한 새끼줄 안에 공존한다.
 "其上不噭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狀 是謂恍惚. 그 위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둑하지가 않으며 마치 새끼줄이 꼬인 것처럼 교차되어 있어 하나의 명칭으로 부를 수가 없다. 아무것도 없는 모습으로 되돌아감으로 그것을 구체적인 모습이 없는 모습이라 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므로 황홀이라 한다."
 道는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 우주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대립적인 범주들끼리의 짜임은 어떤 운동력에 의해서 진행되는데, 노자는 그것을 反이라고 부른다.
 어떤 것도 자체의 배타적 본질을 근거로 존재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립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확보되는 것이다.
 
 4) 결론
 聖智나 仁義의 내용으로 채워진 이념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소박함이 발휘되는 자발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행위원칙이 바로 無爲自然이다.
 노자의 철학은 공자의 차등 유지를 위해 제시된 여러 제한적인 덕목들이나 이념이 자연 질서에 위배되는 것으로 본다.
 正名論을 기본 논리로 하는 공자의 철학은 본질중심주의라 할 수 있고, 이런 사고체계에서는 효율적인 본질 확인과 본질 확장이 요청된다.
 노자 철학은 비본질주의적이다. 노자는 세계의 모든 것이 두 대립면의 관계로 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기에 공자의 철학이 수직적, 직선적, 본질적인 반면, 노자의 철학은 수평적, 순환적, 해체적이다.
 
 2. 털 한 올을 뽑아서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지 않으리라. - 노자가 말하는 '자신을 귀하게 여김'에 관하여.
 1) 서론
 노자의 貴身 관념은 爲我主義와 별 차이 없는 표현이다.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귀하게 여긴다면 천하를 줄 수 있고,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아낀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 - 도덕경 13장.
 자기를 소중히 함(貴身)과 자기 사랑(愛身)의 태도를 천하를 맡을 수 있는 기본적인 자격으로 보고 있다.
 
 2) 양주의 爲我
 양주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시기적으로 노자 앞인지 뒤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양주의 사상을 爲我主義로 규정하게 된 계기는 맹자가 "양주는 나만을 위한다. 털 한 올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 것이 가장 직접적이다.
 주자가 보기에 양주는 겨우 자기만을 위하는 단계에 만족하고 아직 타인을 위하는 단계까지는 미치지 못한 사람이다.
 맹자는 "양주의 爲我主義는 군주가 없는 격이다."라고 비판했다. 극단적 개인주의자의 모습이다.
 1980년대 이후에야 양주의 사상은 가장 급진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이자, 계급제도와 人身이 밀착되어 있는 것에 저항하는 강대한 사상 무기였으며 해방의 의미가 가장 풍부한 사상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양주는 천하에 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몸에 난 털 한 올을 뽑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이어서 그렇게 해야 천하가 잘 다스려진다고 말한다.
 "사람들마다 모두 털 한 올을 뽑지 않고, 사람들마다 모두 천하를 이롭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 - <열자> 양주 편.
 양주의 털 한 올은 바로 몸(身)을 함축한다. 양주가 주장하는 貴生은 바로 貴身이라는 말과 같다.
 양주에게 생명은 관념적이거나 명분적으로 포착된 생명이 아니다. 당연히 爲我는 貴生이자 貴身 혹은 貴體이다.
 그렇다면 나의 몸의 생명을 채우고 있는 실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양주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한다.
 욕망은 유가는 물론이고 도가에서도 금기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양주는 생명력의 내용을 욕망으로 보고 있다.
 욕망은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은 사람을 낳으면서 탐하는 욕망을 갖게 했다. 욕망에는 각각 실정이 있는데, 그 실정에는 절도가 갖추어져 있다." - <여씨춘추>.
 욕망의 실질적인 내용이 실정(情)인데, 실정에는 또 적절한 절도가 들어 있다.
 이 절도에 잘 맞추면 성인이고, 맞추지 못하면 生을 손상시키는 범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연적 생명 안에 욕망과 실정과 절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욕망은 무조건 제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원래 자연 상태로 있을 때의 적절함을 지키도록 요구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全生은 욕망이 모두 적절함을 유지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道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자기 몸을 지키는 것이다. 그 나머지로 국가를 위하는 것이고 더 여력이 있으면 천하를 위한다고 한다.
 양주든 노자든 심지어 공자든 현실세계에서 각자의 도를 실현하는 것이 각 사상가들이 도달하려고 했던 최종 목표이다.
 그런데 양주나 <여씨춘추>에 있어서는 세계에 실현해야 할 도의 정수가 바로 자신의 몸을 지키는 데 있다.
 이 道의 정수는 왜 왜곡되고 잘못되는가?그것은 바로 이름 때문이다.
 "태고적 사람들은 삶은 잠시 오는 것임을 알고 죽음은 잠시 가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마음을 따라 움직이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아니하여 좋아하는 것이 자기 몸에 딱 맞는 것이어서 버릴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름 같은 것에 의해서 권면되지 않았다. 본성에 따라 흐르며 만물이 좋아하는 바를 거스르지 않고 죽은 뒤의 이름은 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형벌 같은 것에 저촉되지 않았고 명예의 높고 낮음이나 수명의 장단을 따지지 않았다." - <열자> 양주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