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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장자, 사기 등 동양고전 읽기

에코맨21 2020. 4. 7. 07:58

우리 시대, 동양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1. 사소한 것들에서 깨달음을 찾다. - 박웅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뉴욕大 텔레커뮤니케이션 석사. TBWA/Korea 임원.『책은 도끼다』『인문학으로 광고하다』등.
 "창문을 열고 편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가지 끝에 흰 것 하나 하늘의 뜻을 보았노라." - 정도전.
 周易을 읽는 이유는 하늘의 뜻을 알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창 밖에 시선을 던졌는데 흰 꽃이 눈에 들어오고 거기서 하늘의 뜻을 깨닫는다.
 "지식은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의 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 법정.
 서양은 어떤 것을 알기 위해 따진다. 따지고 알아보고 분석하고 그리하여 기어이 답을 찾아낸다. 좋은 장점이다. 그런 태도가 화성까지 도달했다.
 화성에 간 우주선의 이름이 Curiosity, 즉 호기심이다. 두려움 없이 끝까지 파헤쳐 뚫고 가는 힘이 우주로 안내했다.
 냉혹한 분석과 치밀함, 논쟁을 통해 이성으로 따지는 능력으로, 지난 200~300년 동안 서양이 人類史를 끌고 왔다.
 반면 동양에서 분석적 삶의 태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봄꽃에서 하늘의 뜻을 보는 능력은 분석,과학적 사고가 아니라 통찰이다.
 "서양철학은 분석의 철학이고, 동양철학은 화해의 철학이다." - 팡등메이. 대만 현대 신유학자.
 동양은 자연을 타자화하지 않았다. 반면 서양의 냉정한 분석과 이성은 자연을 타자화시킨다.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면 자연도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팡등메이는 본질과 현상, 男과 女,이성과 감정, 자연과 인간 등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악성적 이분법이라고 했다.
 "세상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존경의 대상이다." - 禮記 무불경.
 
 2. 글로벌 르네상스의 첫 걸음, 동양고전


 - 주경철. 서울대 경제학과.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히스토리아』『문화로 읽는 세계사』『근대 유럽의 형성』『세상을 보는 눈』등.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1522년 마젤란 일행이 3년간의 세계일주 끝에 스페인에 복귀했다.
 이렇게 시작된 글로벌 시대를 무대로 상품,화폐,군사,정치 등 세계를 지탱하는 모든 기준들의 세계화가 빨라지고 있다.
 오늘날 세상은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소통되고 교환되는 변화의 시대이다.
 이렇게 빨리 변화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보면 변화하지 않는 것, 혹은 매우 느리게 변화해 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중요해질 수도 있다.
 인문학은 이런 변화하는 시대에 중심을 잡아 주고 나름대로 의미있는 답을 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떤 책 한 권만 읽으면 그 문명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비한 경전은 없다.
 17~18세기에 중국고전이 유럽에 많이 전해졌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이다.
 그들은 황제를 개종시키면 중국 전체가 기독교를 믿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중국고전에 대한 공부를 했다.
 "우리가 중국에 선교사를 보낼 게 아니라 중국이 우리에게 선교사를 보내야 할 것 같다." - 라이프니츠.
 "중국에서는 도덕을 통해 권력남용을 막는다. 세상에 이것보다 훌륭한 체제가 어디 있는가?" - 프랑스아 케네.
 "플라톤이 말한 왕이면서 철학자인 사람이 중국에 실존한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다." - 볼테르.
 "중국을 통치하는 것은 덕이 아닌 것 같다. 강압적이다. 몽둥이다. 중국은 전제국가이고 통치의 원칙은 공포다." - 몽테스키외.
 18~19세기가 되면 유럽은 전 세계의 웬만한 고전들을 다 번역한다. 물론 知彼知己 百戰不殆 차원의 접근이라 의도가 선하지는 않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코란,우파니샤드,중국고전 등 굉장히 많은 동양고전을 흡수한다. 나폴레옹은 孫子兵法을 연구했다.
 반면 많은 중국고전이 유럽에 전해진 시기에 중국은 유럽고전에 대해서 거의 까막눈이었다.
 18~20세기 서구문명은 경제적,군사적으로 세계를 지배했고, 보편적 기준을 세계에 폭력적으로 강요했다.
 오늘날 서구문명이 보편적 기준이 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새로운 틀을 짜야 할 때다.

 1. 동양고전에서 인생을 만나다.

 

1>사람에 대한 꿈을 꾸다.『논어』

 

 - 신정근. 서울대 철학과. 同대학원 철학박사.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교수.『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공자씨의 유쾌한 논어』등.
 論語의 저자는 공자의 제자들이다. 우리는 흔히 四書三經을 말하지만, 중국에서는 사서오경을 말한다. ☞ 논어,맹자,대학,중용/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
 四書에는 군자와 소인이라는 두 가지 인간상이 존재하는 반면, 五經에는 역대 聖王들을 칭송한다.
 제자백가의 출현시기는 씨족공동체 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넘어가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老莊은 국가가 善의 기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의무체계를 끊임없이 부과한다고 보았다.
 동아시아 사회는 유일신,絶對神 문화가 아니라, 다신교,자연교,조상신,기능신 등이 있는 사회이다.
 유일신 문화는 다른 것에 대한 탐구를 허용하지 않고, 배타적인 믿음을 강요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탐구가 깊었던 이유는 信의 영역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인 學 역시도 크게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사유의 양극단인 믿음과 학문간의 진폭이 상대적으로 컸다는 말이다.
 현재의 조건을 넘어서서 발전된 상태로 나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신의 구원을 통해서, 배움을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발분망식(發憤忘食) - 어떤 환경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함.
 종오소호(從吾所好) -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아감.
 從吾所好와 發憤忘食이 결합되면 꺼지지 않는 열정, 식지 않는 열정으로 바뀐다.

 2>시대를 바꾼 고민의 힘,『목민심서』
 - 박석무. 전남대 법학 학사/석사. 다산연구소 소장.『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다산기행』등.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다.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
 다산은 청렴이 천하의 큰 장사이며, 청렴한 사람이 진짜 큰 욕심쟁이라고 했다. ☞ 군주가 아니라면 청렴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식과 역량까지 갖춰야 한다.
 "이익에 유혹당하지 말고, 위엄에 굴복해서도 안 되는 것이 목민관의 도리이다. 비록 윗사람이 독촉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한다."
 사리에 합당한 법은 조건없이 지켜야 하지만, 무조건 법대로 하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
 윗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라고 하면 죽지 않을 거면서, 악법은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3>향기로운 삶, 의미 있는 삶,『성학십도』- 이광호. 서울대 철학과. 同대학원 철학박사. 연세대 철학과 교수.『성학십도 역주』『한국의 사상가 10인』등.
 자연과학 지식은 대상을 통해 연구하고 축적해온 것이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의 연구대상이 되지 않는 것도 많다. 道,해탈,수양,眞生 등은 자연과학으로 연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객관적으로 대상적으로 이해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진리라는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았다.
 마음이 편안하고 의미있으며 향기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학문이 聖學이다. 한마디로 聖學은 과학과 상보적인, 성인이 되는 학문이다.
 물리학,화학,기계공학은 이치를 탐구한다. 퇴계가 고민한 理는 대상적 사물의 이치가 아니라 道理에 속하는 理이다.
 퇴계가 지향한 학문은 爲己之學이다. 자신의 인격적 완성을 위한 내면의 학문이다. 결국 聖學은 인간의 향기를 피우는 학문이다.
 
4> 스펙보다 더 중요한 자기발견,『격몽요결』
 - 한형조. 서울대 철학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교수.『근사록』『왜 동양철학인가』, 『조선유학의 거장들』등.
 현자들의 우화는 대체로 인간의 무지를 두고 한 일침, 혹은 풍자인 경우가 많다.
 인문학은 몇 가지 효용이 있다.
 1)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하고,
 2) 삶을 견디는 기술을 습득시킨다. 삶은 녹녹하지 않다. 맷집이 튼튼해야 한다. 약하면 쓰러진다.
 3) 의미와 유대를 강화하는 훈련이다. 소통을 강화시켜 주는 기술을 가르쳐 준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다고 불행해지는 일은 없다.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맹자는 닭이나 개가 집을 나가면 온 식구가 찾으러 나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누군지 모르면서 찾지 않는다고 말했다.
 완고함은 모든 사람의 정신적인 경화를 상징한다.
 聖人이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된 사람, 자신의 가능성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 성숙한 인간이다.
 모든 것이 마케팅을 지향하는 척박한 시대다.
 우리는 새 것이나 명품을 사야 좀 있어 보이는 것처럼 만드는 광고에 세뇌가 되어서 그런 것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행한 것처럼 느낀다.
 사회적 시선을 의식한 가치와 광고에 세뇌되어 매스컴이 권하는 대로 소비하고 살다 보니, 자기가 정말 뭘 쓰고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게 되었다.
 우리는 늘 타인의 의견에 추동되고, 그래서 자신이 아닌 남의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다." - 라캉.
 마음을 수련한다는 것은 외부적 자극을 통제하는 기술에서 출발한다.
 고전은 파고들어 씹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떤 상황,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힘과 기량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실존의 모든 책임은 자기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을 원망하지 않게 된다.
 "지혜는 살아가는 기술이며, 그 최종 목표는 행복이다... 거기 이르는 길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게 아니고, 오직 덕성을, 자신을 완성시키는 곳에 있다." - 윌 듀런트. <철학 이야기>.
 
 5>절대 권력의 눈물,『한중록』
 - 정병설. 서울대 국문학과. 同대학원 국문학박사.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권력과 인간-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나는 기생이다』『구운몽도』등.
 영조의 며느리이자 사도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1735~1815)는 정조의 생모이며, 순조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궁중에서만 70여 년을 살았다.
 영조는 40세에 얻은 사도세자의 학습부진을 늘 모질게 다루었다.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은 세자빈의 권력을 등에 업고 18세기 중반 조선을 주름잡았다.
 세자는 10세 때 결혼했지만 15세 때 합방을 시작했고, 동시에 대리청정을 맡기 시작했다. 홍씨는 이를 몹시 서운해 했다.
 이후 세자는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으며, 발작을 일으키면 본성을 잃었으며, 증세는 악화되어 갔다.
 결국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이 영조에게 자기 아들을 죽여 달라고 했다.
 "세자가 내관,내인,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기생,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 <폐세자반교>. 영조에게 한 선희궁의 말을 인용.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들고 방으로 와서 혜경궁에게 들이밀었다고 한다. 혜경궁 역시 남편이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사도세자(1735~1762)는 28세 되던 해에 뒤주에 9일 동안이나 갇혀서 죽었다. 그가 죽을 당시 영조는 69세였다.
 정조(1752~1776~1800)는 집권하면서 외척을 배척했다. 그는 외가 세력을 反사도세자 파에 슬그머니 갖다 붙여 쳐낸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면서 외가를 공격했다. 홍씨 가문은 한순간에 끝없이 추락했다.
 혜경궁 홍씨 친정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고, 그래서 내놓은 책이 바로 閑中錄이다. 閑中錄은 1795년에 지어졌다.
 결국 閑中錄은 어머니가 아들 정조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쓴 책이다.
 "사도세자는 어려서 총명했으나 자라면서 아버지의 구박을 받아 미쳤고, 그 결과 발작을 일으키면 반감으로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는데 이로 인해 반역죄로 몰려서 죽음에 이르렀다." - 閑中錄.
 <閑中錄>은 일반독자를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손자인 순조가 주독자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은 생략되어 있다.
 
 2장. 동양고전으로 행복을 꿈꾸다.


1>사람을 생각합니다.『맹자』- 성백효. 고려대 한문교육학과.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명예교수. 『논어집주』『맹자집주』등.


 맹자(BC.372~289)는 魯나라와 인접한 추(鄒)나라에서 출생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周나라 왕실과 제후간의 위계가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아무리 강력한 제후라도 周나라를 높여야 한다는 尊周大意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는 여러 제후들이 천하를 놓고 겨루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어떤 제후든 왕도정치를 행하면 王者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왕도정치란 민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 민본은 표면적인 것이고 왕권을 낮춰 士 계급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 속내였다.
 전하는 말로는, 맹자는 공자의 손자이자 증자의 제자인 자사(BC.483~402)에게 수학했다고도 하고, 자사의 문도에게 수학했다고도 한다. ☞ 자사가 죽고 나서 30년 후에 맹자가 태어났으므로, 자사에게 수학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자사의 문도에게 수학했다는 것도 시기적으로 의심스럽다.
 
2>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자유,『장자』


 - 강신주. 연세대 철학박사.『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철학이 필요한 시간』『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등.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장자>는 魏晋 시대 사상가 곽상이 편집한 것으로 총 33편, 64,606자로 이루어져 있다.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으로 묶여 있다. 그런데 곽상의 판본은 일종의 축약본이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 편에는 <장자>가 전체 52편으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 노장신한열전 편에서 <장자>가 10만 여 言을 썼다고 말한다.
 그런데 곽상의 판본은 편집본임에도 내편 7편은 거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장자>는 300~400년에 걸쳐서 쓰여진 책이다.
 장자(BC.369~289)가 전국시대 중기 사람인데, 晉나라 이후 사건과 기사가 나오면 장자가 쓴 글이 아니다.
 내편에는 장자의 사상이 온전히 담겨 있고, 외편과 잡편에는 晉나라 이후 장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후학들이 쓴 글이 담겨 있다.
 원문에 장자와 장주라는 이름이 함께 나오는데, 장자 우화는 장자의 후학들이 장자를 매우 신성시하며 쓴 글들이다.
 그래서 장자 우화에는 장자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자유로웠고 逍遙遊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여기에 나온다.
 반면 장주 우화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장자학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다.
 장주 우화의 장자는 보통사람과 비슷한데 약간 냉소적이고 유머있는, 가진 건 없지만 자존심만 내세우는 전형적인 지식인의 모습이다.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3>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중용』-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과. 쓰쿠바大 철학박사.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교수.『대학중용강설』『한마음의 나라, 한국』등.


 <中庸>의 저자는 공자의 손자 자사이다. 大學과 中庸은 원래 禮記 속의 각 편이었는데, 宋나라 때 주자가 분리해 독립시켰다.
 大學은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정치적 방법을 서술한 반면, 中庸은  개인의 내면세계의 해석을 통한 철학적 접근법을 전개했다.
 역사는 마음을 챙겼다 몸을 챙겼다 하면서 순환한다. 오늘날은 몸을 더 챙기는 시대다. 물질주의 시대다. 돈이 최고다. 그래서 자본주의다.
 물질주의 사회를 안정시키는 비결은 법으로 다스리는 법치주의이다. 그래서 어느 대학에서도 경영학과 법학이 가장 인기가 높다.
 
 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사기』


 - 김영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대한중관계사 박사. 前영산원불교大 교수.『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사기의 리더십』『난세에 답하다』등.


 사마천(BC.145~86)의 <사기>에는 주인공이 200여 명, 등장인물이 4천 명이 넘는다. <사기>는 526,500자에 달하는 방대한 책이다.
 130권에 가운데 고조선 멸망사가 담긴 제115권 조선열전은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漢무제가 고조선을 침공해서,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내분으로 멸망한다. 이때 사마천은 38세였다. 당연히 조선열전은 생생한 기록이다.
 사기에는 사자성어가 600개 정도 나온다.
 과하지욕(袴下之辱) - 한신이 남의 가랑이 밑을 기는 치욕을 견디었다는 말이다. 사소한 시비는 넘어갈 절도로 큰 뜻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중구삭금(衆口鑠金) -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유언비어의 폐해를 지적한 말이다.
 중국 최초의 농민 봉기군 진승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주인이 되려면 자신의 가치를 먼저 긍정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王侯將相寧有種乎. 왕,제후,장군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
 "세상을 가장 잘 다스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익을 이용해 이끄는 것이며, 그 다음은 가르쳐 깨우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을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고, 가장 못난 정치는 백성들과 다투는 것이다." - <사기> 화식열전.
 도가 방식 - 관중 방식 - 유가 방식 - 법가 방식 순으로 정치수준을 평가하고 있다.
 향후 한국은 장기침체로 접어들 가능성이 커 보인다. 남북관계도 경색되어 있다. 대외의존도 또한 깊어지고 복잡한 상황이다.
 이런 장기침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혁 밖에 없다.
 秦목공은 후진국이던 秦나라의 부흥을 위해 四不問 정책이라고 하는 개혁적인 인재정책을 실시했다.
 인재를 기용하는데 민족,국적,신분,나이를 따지지 않았다. 여기에 남녀불문을 덧붙이면 완벽한 개방형 인재정책이 된다.
 기록에 남아 있는 秦나라 재상 25명 가운데 17명이 외국 출신이고, 7명은 국적 불명이며, 1명만 秦나라 출신이다.
 그렇게 해서 백리해,건숙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秦나라에 들어와서 秦목공을 춘추오패 중 네 번째 패주가 되게 한다.
 秦효공 때 상앙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게 모든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진시황의 도량형 통일, 화폐통일 등 모든 개혁정책은 상앙이 먼저 주도한 것이며, 진시황은 그것을 여섯 나라로 확대한 것일 뿐이다.
 "법이 안 지켜지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 상앙.
 "확신 없는 행동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으며, 확신 없는 사업에는 성공이 따르지 않는다. 나라를 강하게 하려면 낡은 습속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며, 백성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낡은 예의범절에 매이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에 제지당하고, 현명한 자는 예를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에 구속당한다." - 상앙. <상군열전>.
 성황이 어려우면 개혁을 해야 할 시기다. 스스로 자신을 개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12. 3천년 지속된 사랑의 공식,『시경』- 김언종. 경희대 국문학과. 대만 국립사립대학 국문연구소 박사.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한자어 의미 연원사전』등.


 <시경>은 기원전 11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까지 50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황하가 관통하는 중원지역에서 유행했던 시 305편을 묶은 책이다.
 정확하게는 311편인데, 6편은 제목만 남고 가사가 없어졌다. 그래서 오늘날 전하는 것은 305편이다.
 詩經의 원래 제목은 詩이다. 300여 편의 시가 실려 있어 詩三百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다가 기원전 2세기 경 漢무제 때부터 詩經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는 유학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배경이 깔려 있다.
 이때 동중서는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해 교육기관에 학과를 개설하고 역경,시경,서경,예기,춘추 등 오경에 능통한 오경박사를 두었다.
 조선시대만 해도 시경 305편을 다 외우지 못하면 선비에 끼지도 못했다.
 어떠한 학문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특정 목적에 이용되면 대개 진실에서 멀어진다.

 3장. 동양고전에서 창조를 발견하다.


 1> 피어라 상상력, 만나라.『산해경』- 정재서. 서울대 중문학 석사/박사. 이화여대 중문학과 교수.『산해경 (역주)』『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신화』등.


 상상력,이미지,스토리는 오늘날 인문학에서 중요한 화두이다. 근대에는 이 세 가지를 불온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여겼다.
 머리를 쥐어짜면 모든 걸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흔히 상상력은 자유롭다고 하지만, 그리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신화에 대한 관심이 재조명되는 이유다.
 우리는 인어 아가씨가 연애만 해야 한다고 상상한다. 상상력이 제도나 문화나 교육에 의해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어느 하나로 획일화되어 있다면, 이를 상상력의 제국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정치,경제적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많이들 비판하지만, 정신세계의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논의가 부족하다.
 동양에는 전통적으로 天人合一 사상이 있다. 천은 하늘이면서 자연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연과 동물을 신성시 했다.
 그러기에 半人半獸를 괴물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한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서양문화의 발상지라 여겨지는 그리스에서는 인간중심 철학이 발전했다. 여기서는 자연은 인간의 지배대상이고 동물도 인간보다 열등하다.
 그러기에 半人半獸의 모습은 사악한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스핑크스,세이렌,메두사 등은 모두 사악한 괴물로 등장한다.
 상상력의 제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보다 다원화시킬 필요가 있다.
 지난 100년간 우리 것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먼저 알아야 했고, 안데르센 동화를 먼저 읽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전통신화, 즉 우리의 상상력의 원천을 잃어버렸다.
 상상력과 관련된 동양고전 중 대표적인 책은 신화서인 <산해경>이다.
 사마천은 山海經을 "不敢言之也. 나는 감히 이 책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며 奇書라고 표현했다.
 山海經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체로 전국시대인 기원전 3~4세기 무렵이다.
 지식인 계층이 지은 게 아니므로, 당시의 표준 생각과는 다른 기층문화를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山海經에는 중국 뿐 아니라 인근의 한국,일본,베트남,티베트,몽골 등 동아시아 전역에 살던 많은 종족들의 생활상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대륙은 하나의 중국이 아니라, 수많은 종족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던 무대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백제 때 일본에 山海經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山海經이 읽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신수 및 괴수의 형상은 간접적으로 山海經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
 신화는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우리가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부분은 미국 근대 청교도인 토마스 불핀치가 너무 외설적이고 폭력적 내용을 삭제하고 새롭게 윤색한 것이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 <산해경> 해내경.
 중국의 동해는 서해이고, 북해는 발해이다. 이는 고조선이 발해만 연안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2>천재의 광기,『매월당집』과『금오신화』- 심경호. 서울대 국문학과. 교토大 문학박사.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김시습 평전』『금오신화』등.


 김시습(1435~1493)은 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신하로 이맹전,조려,원호,김시습,성담수,남효온을 말한다. 반면 단종이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여섯 신하를 死六臣이라 하는데, 성삼문,유성원,하위지,유응부,박팽년,김문기를 말한다.
 김시습은 이미 20대 후반에 불법에 밝은 승려로 알려져 효령대군(태종의 2남)의 청으로 <묘법연화경> 언해 사업에 초빙된 바 있다.
 동시에 김시습은 조선 수련도교를 개창했으며, 도교 양생술을 논하기도 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시를 짓고 글을 썼던 문인, 성리학과 정통 유가사관의 주제를 저술로 남긴 참여지향의 선동가, 불교의 철학적 사유를 유교의 이상과 연결시키려 했던 철학자, 몸과 생명을 중시해 수련도교를 실천한 혁신적 사상가, 인도주의자, 여행가...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지만, 한 번도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일생 동안 방랑생활을 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불교에서는 分別智라고 하는데. 김시습은 진리는 종파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통합했다. ☞ 불교에서는 分別智, 도가에서는 分別知라 한다.
 한 번은 한양 거리에서 공신 정창손을 만났는데, "너같은 놈들 때문에 정치가 제대로 안 된다."며 소리를 질렀다.
 영의정까지 올라간 사람이 그런 소리를 듣고도 슬며시 물러났다. 그의 광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자는 앎의 대상이 무한하므로 유한한 삶의 기간에는 그것을 모두 알 수 없으니, 자잘한 지식이나 충고를 끊고 거대한 도를 깨우치라고 말한다.
 김시습은 老莊을 연구하면서 생명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연구했다.
 그리고 노동에 그 해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생 동안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직접 화전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김시습은 30대까지 경주 남산 부근에 살았는데, 이때 국내 최초의 한문소설 <金鰲新話>를 집필했다.
 고려시대 원효는 無諍大師 혹은 和諍大師라는 법호를 받았는데, 무쟁(無諍)은 논쟁이 없다는 뜻이다.
 원효는 어떤 종파 이론에도 치우치지 말고 통합적으로 보자며, 종파간 화합을 위해 노력한 사상가다.
 김시습은 원효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다. 원효의 聖과 俗을 넘나드는 삶과 원효의 방대한 저술 때문이었다.
 김시습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싶어 했다.
 "眼底不見人與我. 남과 내가 구별됨을 아예 보지 않노라." 시골 사람들과 일체가 되어 살다 보니 매우 친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는 벼슬을 피했지만, 남들에게도 과거를 보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 자신의 원칙을 남에게 강권하다가 죽임을 당한 최영 장군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나는 내 원칙을 지키지만 너는 너의 원칙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만드는 우리의 정신이 중요하다.
 그는 천재라고 칭송을 받았지만, 늘 절대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사람이었다.

 3>유머와 열정의 패러독스,『열하일기』- 고미숙. 고려대 독문학과. 同대학원 국문학박사. 고전평론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등.
 박지원(1737~1805),정조(1752~1776~1800),정약용(1762~1836),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이해하면 연암의 사상과 그 시대의 기반을 통찰할 수 있다.
 보통 연암과 다산을 실학파로 분류하고, 다산이 후배니까 연암의 사상을 이어받아 종합한 걸로 대개 교과서에는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세계관,스타일,문체,당파 등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두 명의 천재가 상생, 상극하고 있었다.
 연암이 살던 시대는 老論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연암은 老論 명문가문 출신인데다 어려서부터 천재였지만 관직에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반면 재야 南人 출신인 다산은 과거공부를 열심히 해서 관료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으면서 모든 게 와해되고 풍비박산이 난다.
 연암과 다산 모두 실학사상을 갖고 있었으니 서로 친했을 것 같지만, 그들은 사대문 안에 살면서도 평생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정조를 중심으로 연암과 다산은 끊임없이 양쪽 축에 있었다. 연암의 글에는 한 번도 다산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마칠 무렵 <목민심서>에 <열하일기>의 어떤 대목들을 인용한 게 전부다.
 연암은 왜 과거를 거부하고 스스로 포기했을까?
 우리는 영,정조 시대가 대단히 좋은 시대라고 생각하지만, 당시는 양반의 수가 너무 많아져 과거제도가 엉망이던 시대였다.
 창경궁에서 과거를 치르는 날 시험장 문을 열면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험생 뿐만 아니라 그들이 대동하고 온 사람들과 심지어 대리시험자까지 들어왔다. 이를 한 번 겪은 연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너무 신통하다. 다시는 그런 곳에 가지 않겠다."
 연암은 격식을 따르는 걸 매우 싫어했다. 그는 규격화되고 제도화되는 것을 극렬하게 싫어하는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런 기질이 표출된 것 중의 하나가 우울증이다. 우울증은 조선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든 병이었다.
 우울증은 기본적으로 자기로부터의 소외에서 온다.
 그는 우울증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저잣거리에 나가서, 거리의 온갖 사람들을 만난다. 사실 우울증 치료에는 이게 최고다.
 나로부터 소외가 일어났으니, 즉 내가 나와 친하지 않으니 타인과 친할 리가 없다.
 그런데 내가 늘 만나던 사람을 만나면 치유가 안 된다. 다르게 산 사람을 만나야 치유가 된다. ☞ 그래야 자신을 재발견하게 되고, 자신과 친해진다.
 연암은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담아 낸다. 그것이 바로 초기작 <방경각외전>이다.
 여기에 양반전,민옹전,김신선전,예덕선생전,광문자전,우상전,마장전,악학대도전,봉산학자전 등 총 9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이 책으로 연암은 유명인사가 된다. 사실 <방경각외전>이 없으면 조선 후기 소설사는 구멍이 뻥 뚫린다.
 내가 선비임을 증명하려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살았다는 걸 문장으로 증명해야 한다.
 연암은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으면서 관료로서의 특권을 누릴 때 이게 가장 부패한 계급이 된다고 생각했다.
 연암은 友道의 중요성을 삶에서 보여 준다. 바로 백탑청연(白塔淸緣)이다.
 백탑은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말하는데, 당시 연암의 친구들이 백탑 근처에 주로 살면서 지성과 우정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들을 백탑파라고 하는데, 직업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만나서 지식의 향연을 펼친다. 심포지엄을 연 것이다.
 연암은 30대 내내 지성,음악,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이때 조선이 새로운 사상사가 열린다.
 당시 모든 사대부 청년들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당송팔대가의 시와 같은 고문의 문장을 그대로 모방했다.
 이를 타파하고 새로운 형식의 글을 쓰는 문체의 실험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청나라의 앞선 문물제도 및 생활양식을 받아들일 것을 내세우는 북학이라는 학풍이 대두되었다.
 1780년 40대 중반을 통과하던 연암에게 중원 대륙을 유람할 기회가 찾아왔다. 여기에서 <열하일기>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굴욕을 당한 이후 원수를 갚아야 한다면서 북벌을 외쳤지만, 정작 군사력은 키우지 않았다.
 만주족 오랑캐가 10년도 안 되어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주족은 무려 150년 동안 청나라는 태평천하를 열어 가고 있었다. 여기에 明나라/조선의 선비들의 딜레마가 있다.
 오랑캐가 150년간 태평치세를 이루니 하늘이 인정한 것임을 한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의 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백탑파가 내세운 북학 이론이다.
 연암의 지기인 홍대용,박제가는 이미 청나라를 다녀왔다. 연암도 뒤늦게 다녀오게 되는데, 이는 일생의 변곡점이 된다.
 박제가는 중국어를 번역해서 청나라의 문명을 받아들일 시간이 없다며 중국어를 그냥 조선의 공식어로 삼자는 과격한 주장을 했을 정도이다.
 "淸 문명의 장관은 깨진 기와조각과 똥 부스러기에 있다." - <열하일기>.
 깨진 기와조각들을 모아서 정원을 꾸미고, 담벼락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주 이상한 브리콜라주가 되어 그것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낸다.
 거리의 말똥을 잘 말려 땔감으로 사용하거나, 돈대를 만들어 놓은 걸 보고 청 문명의 장관이라고 말한 것이다.
 가난하고 천한 물건을 재활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문명의 정수를 본 것이다.
 한 나라가 잘 통치되고 있는가는 사람들이 자기 삶을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보면 안다.
 일상의 리듬을 보면 되고, 자기가 처한 공간을 얼마나 아끼고 정갈하게 하는지를 보면 안다.
 우리가 빈민가를 비참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저분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구도자가 사는 교회나 사찰에는 그 안에 천지를 품고 있다.
 결국 자기가 어떤 공간을 만드느냐가 자기 삶의 척도이다.
 연암은 천하의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이런 시대라면 태평천하라고 본 것이다.
 정조는 문체반정을 일으켜서 "이 모든 것의 배후는 연암이고 열하일기다."라고 지목했다.
 유머와 역설이 문체를 어지럽게 했다고 본 것이다. 이게 권력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이다.
 <장미의 이름>은 엄숙주의나 권위주의는 웃음을 싫어한다는 걸 극명하게 드러낸다.
 중세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다."라는 내용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 필사본 때문이었다.
 수도원 장서관에 있는 이 책을 수도사들이 몰래 읽다 늙은 수도사 호르헤가 양피지에 발라놓은 독약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자기 구원의 문제가 <일야구도하기>에서 나온다.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이 오면 모든 게 멈춘다. 그래서 동양에서의 道는 "생사의 관문을 연다."라고 말한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잘살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의미다. 결국 유학자든 불자든 모두 이것을 열거하면서 평생 도를 닦는다.
 현대인은 죽음을 아예 생각조차 안 한다. 죽는 사람도 못 본다. 죽음과 삶을 완벽히 단절시켜 놓는다.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 한다.
 동양의 선사들은 죽음에 대한 깨우침을 우주적 농담이라고 표현한다. "생사가 하나다."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면 도가 되는 것이다.
 연암이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다 보니 강물에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때 지성의 정수를 모아서 터득한 게 "이제야 도를 알았도다. 명심(冥心)이 바로 道다."라는 것이다.
 명심(冥心)은 耳目에 사로잡힌 분별망상의 허황한 불빛이 꺼진 상태이다. 그러면 내면의 빛이 나온다.
 연암은 평정을 얻은 뒤 자신이 깨달은 도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한다.
 "한 번 떨어지면 물을 땅이라고 삼고 물을 옷이라 삼고 물을 몸이라 삼고 물을 마음이라고 삼으리라는 깨달음에 도달하니까,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데도 방 안 궤석(几石)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했다."
 熱河日記는 자기 존재의 완벽한 脫영토화, 즉 어디에도 얽매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길을 알려 준다.
 길 위에서 삶의 비전을 찾고 그 삶의 비전이 글로 생산될 수 있으면, 모두가 자기 지성의 주체이자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