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 인간의 단편화에 저항한다. 2015년
일본 문부과학성은 전국 국립대학에 '교원양성계, 인문사회과학계 학부의 폐지 또는 전환'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이유는 당장의 사회적 니즈에 맞추기 위해서라고 한다.
니즈라니? 도대체 누구의? 그것은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체제 지배층의 니즈일 것이다.
기계적 능력만 키운 저임금 노동자와 소비욕망에 휘둘려 상품을 사는 소비자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것이 자본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철학,역사,문학,예술 등을 접해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타자와 대화하는 방법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아니 타자는 차치하고 자기 자신의 권리조차 지킬 줄 모르는 상태로 성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일찍이 와타나베 가즈오는 패전의 경험을 통감하면서 "광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기계화,야만화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해야 한다."고 술회했다.
인간의 기계화,야만화 과정은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다. 그 상황은 대학교육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부정하는 상황에 도달했다.
이런 경향에 박차를 가하면서 인간의 단편화를 압박하는 요인이 사람들의 컴퓨터 및 SMS 의존이다.
1. 에드워드 사이드의『사이드 음악평론』- 클래식의 감명, 그 심연의 뿌리를 캐는 즐거움.
"책을 버리자. 거리로 나가자." - 데라야마 슈지. 시인. → 머리만 큰 대갈장군 같이 지적인 세계에만 갇혀 있지 말고, 사회적인 행동에 나서라.
2. 프리모 레비의『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살아남은 인간의 수치, 그럼에도 희망은 있는가?
현실은 평화나 인간존엄의 가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알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눈앞의 사리사욕, 비굴한 보신, 지적 태만과 무기력, 왜곡된 자기애, 기타 갖가지 이유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안이한 희망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3. 조지 오웰의『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노예노동의 고통조차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탐구욕.
4 루쉰의『망각을 위한 기념』- 망각의 절망 속 어렴풋한 희망의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건대,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 <고향>.
5. 니콜라이 바이코프의『위대한 왕』-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동시에 읽어 내는 즐거움.
어릴 적 이 책을 통해 얻은 것은 텍스트를 읽는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이 책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어떤 인물에 의해 씌어지고, 누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등에 대한 관심은 컨텍스트(맥락)를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책은 텍스트로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컨텍스트(맥락)을 생각하면서 읽어야 통찰을 얻을 수 있다.
6. 에드워드 사이드의『지식인의 표상』- 현대의 지식인들이여, 아마추어로 돌아가라.
"지식인의 공적 역할은 아웃사이더요, 아마추어이며, 현상의 교란자다."
"오늘날 지식인 본연의 자세를 위협하는 것은 아카데미도 저널리즘도 출판사의 상업주의도 아닌, 전문주의다."
"현재의 교육제도로는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은 좁은 知의 영역에 갇혀 버린다."
"전문 분화된 사람은 그저 순종하는 존재가 된다." ☞ 교육이 인간과 세상을 위한 수단이어야 하는데, 전문주의는 자신의 분야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의 감동이나 발견의 감각은 사람이 지식인이 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감각인데, 전문 지식인이 되면 모두 압살당하고 만다."
그 결과 자발적 상실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사이비 지식인들이 정부나 기업 주변에 모여든다. 그 복합체를 형성하는 개개의 사람들은 얼핏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처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자비하다고 할 정도로 냉혹하게 권력을 행사하거나 이윤을 추구한다.
그런 軍産學 복합체 문제는 이미 1960년대 베트남전쟁 시절부터 지적되어 왔지만, 점점 악화되어 지금은 일본의 원자력 마피아만 보더라도 명백하다.
일본의 아베 정권은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을 외치며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의 전환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럴 때 동원하는 전형적인 수법이 有識者 회의라는 것이다. 대학교수 등의 계급장을 단 有識者, 실은 아베 정권에 가까운 사이비 지식인들에게 자문하고 답신을 받아 일반인들의 비판을 풋내기 얘기라며 봉쇄해버리고 자의적인 정책결정을 한다.
사이드가 비판한 전문가들이 유감없이 활용되고 있다. 거기에 있는 사상은 시니컬하기까지 한 愚民觀이다.
사이드는 이런 전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추어리즘이란 이익이나 이해 또는 편협한 전문적 관점에 속박되지 않고 걱정이나 애착이 동기가 되어 활동하는 것이다.
현대의 지식인은 아마추어이어야 한다. 아마추어라는 건 사회 속에서 사고하고 걱정하는 인간을 가리킨다.
아마추어로 돌아가라. 그리고 세계와 인류에 대한 책임을 지라.
7. 이브라힘 수스의『유대인 벗에게 보내는 편지』- 그대는 침묵으로 살인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팔레스타인 땅의 아랍인과 유대인이 공존하는 길은 설사 아무리 험하고 온갖 장애가 가로놓여 있더라도 역시 걸어갈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홀로코스트 피해자 이야기를 국가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용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나치의 포학성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8. 요한 하위징아의『중세의 가을』- 비관적 현실을 냉철하게 응시하는 낙관주의자를 만나다.
"15세기라는 시대만큼 사람들이 죽음의 사상에 짓눌리고 끊임없이 강렬한 인상을 받은 시대는 없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외침이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9. 미셸 드 몽테뉴의『몽테뉴 여행일기』- 관용은 연민이 아니라 생기발랄한 관심이다.
몽테뉴 자신은 구교 쪽에 몸을 두고 있었으나, 늘 관용을 설파했으며, 정의를 내세우는 자를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수상록>에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플루타르코스,세네카 등 고전고대의 문헌 인용이 많지만, 성서의 인용은 거의 없다.
근대적인 합리주의 정신을 갖춘 인문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몽테뉴 여행일기>는 1580~1581년에 걸쳐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간 여행기록이다.
여행의 목적은 우선 인문주의자가 동경하던 땅 로마를 방문하는 것, 그리고 지병인 신장결석 요양을 위해 온천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여행이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행의 목적이 없었다. 여행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여행의 이유를 묻는 이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엇을 피해서인지는 알고 있으나,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 <수상록>.
로마에서 다수의 프랑스인을 만났고, 거리에 나가면 그들이 프랑스어로 인사를 해서 몽테뉴는 비위가 상했다.
그가 자신들의 풍습에 신물이 나서 여행에 나선 판에 이국에서까지 자국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여행의 즐거움은 문자 그대로 불안과 동요의 증거라는 것을. 그러나 이 불안과 동요는 모두 우리 인간의 중요한 그리고 지배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무엇 하나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없더라도 다양성을 포착할 수만 있다면 나는 만족한다."
자기 속에 좁게 틀어박혀 자족하기보다, 불안과 동요가 있더라도 타자와의 만남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성을 포착할 수만 있다면 만족했다.
그렇다. 관용이란 자기만족적인, 높은 곳에 서서 타자를 연민하는 태도가 아니라, 생기발랄한 인간적 관심으로 다양성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10. 케네스 클라크의『그림을 본다는 것』- 미감을 즐길 시간은 오렌지 향보다 길지 않다.
11. 필리프 아리에스의『죽음의 역사』- 죽음을 금기시한다는 건 삶을 방기하는 것.
필리프 아리에스는 죽음에 대해 네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1) 길들여진 죽음 - 중세 전기까지 인간은 죽음에 대해 친밀감을 갖고 있었다. 노쇠하면 죽을 때를 알고 운명과 자연의 섭리에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러시아인도, 타타르인도, 우드무르트인도... 그들은 모두 편안하게 죽음을 인정했다. 마지막 순간을 연장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은 매우 차분하게 그것을 위한 준비를 하고, 미리 암말은 누구에게 주고, 망아지는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정했다... 그리고 그저 살던 오두막집을 이제 바꿔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듯 일종의 안도감 속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암 병동>.
2) 나의 죽음 - 중세 후기가 되면 부,학식,권력을 쥔 사람들은 자신이 집행유예 중인 死者라는 것, 유예기간은 짧고, 죽음은 이미 자신의 내부에서 시작되어 자신의 야심을 깨뜨리고 쾌락을 좀먹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죽음은 인간이 자신을 가장 확실히 알게 되는 장이었던 것이다.
3) 너의 죽음 - 18세기 이후 죽음을 치켜세우고, 비극적인 것으로 여기며, 죽음이 인상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낭만주의적인, 화려한 말로 장식된 죽음은 일단 타자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4) 금기시된 죽음 -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극적인 변화로, 사람들은 이제 집에서, 가족들에 둘러싸여 죽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홀로 죽는다. 죽음은 일련의 자잘한 단계로 해체되고 세분되어 최종적으로 무엇이 진정한 죽음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죽어가는 본인이 죽음의 주도권을 박탈당하고, 죽음을 둘러싼 격정은 병원에서도 사회에서도 피해야만 하는 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죽음의 금기시는 20세기 초 무렵 미국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슬픔이나 탄식의 모든 원인을 피하고, 비탄의 밑바닥에서도 늘 행복한 듯한 모양새를 해서 집단의 행복에 공헌한다는 윤리적 의무와 사회적 강제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필리프 아리에스는 말한다.
그는 죽음을 종교적 관념의 껍질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문맥 속에 놓고 관찰한다.
그래서 독자가 1,000년에 이르는 장대한 세월 속에서 죽음을 바라보고, 죽음에 관한 그들 자신의 관념을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재촉한다.
그리하여 각 시대에 고유한 죽음의 관념에 속박되어 있는 우리에게 일종의 해방감을 주는 것이다.
12. 가토 슈이치의『양의 노래』- 인간이라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1930년대 말부터 1945년까지 일본에서는 사람을 모독할 때 '그래도 당신이 일본인인가'라는 말이 유행했다.... 집단에 대한 귀속의식을 중심으로 단결을 강조하고,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천황을 숭배한다... 많은 일본인이 그런 규격에 맞춰 살아가고 있었다." - 가토 슈이치. <석양 망언>.
가토 슈이치는 전쟁 말기, 벗인 시라이 겐자부로(불문학자)가 다른 학우로부터 "자네, 그래도 일본인인가."라는 힐난을 받았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시라이는 차분하게 "아니, 먼저 인간이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캐나다의 대학에서 가르치던 때 가토 슈이치는 학생과 동료들이 펼친 베트남 반전운동에 참여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그는 이런 사건을 언급했다. 대학의 반전토론회에서 어느 정치학 교수가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란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다. 그 복잡한 원인을 모르면서 반대해 봤자 멈출 수 없다." - 정치학 교수.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정치학자가 현상의 설명에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현상의 긍정으로 기울 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만일 주어진 조건을 바꿀 수 없다면 필연적 결과를 바꿀 수도 없다. 따라서 '필연적 결과 = 현상'에 반대하는 것의 의미도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전쟁과 같은 극도로 복잡한 현상에서는 그 필연성이란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 조건이 많은 현상은 엄밀하게 인과론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문제다. 폭격으로 매일 아이들이 죽어가는 건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 가토 슈이치.
13. 잉게 숄의『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백장미를 기억하던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언제가 되면, 도대체 언제 국가는 그 최고의 임무가 그저 몇백 만의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행복을 안겨 주는 것이라는 걸 인정할까? 그리고 언제, 국가는 전혀 눈에 띄지 않지만 평화를 향해 애쓰는 많은 발걸음들이야말로 개인에게도 여러 민족들에게도 전쟁에서의 대승리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 잉게 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14. 피에로 말베치 등이 엮은『사랑과 저항의 유서』,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어느 가족의 대화』- 풍화되는 투쟁, 하지만 정의의 실천을 게을리 말라.
피와 눈물로 뒤범벅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성과가 자칫 폐기될지도 모르는 지금 한국에서도 정의의 실천을 게을리하고 있지 않은가?
15.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어느 가족의 대화』, 가와시마 히데아키의『이탈리아 유대인의 풍경』- 참극의 유대인 거리에 남은 것과 변한 것.
反파시즘 투쟁을 떠맡았던 전후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지적 문화를 형성했던 세대는 거의 퇴장했다.
가장 뛰어났던 인간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조야하고 천박한 포퓰리스트들의 거칠고 사나운 목소리들이 사회를 휘어잡으려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이민 배척을 외치는 극우 세력이 대두하고 있다.
16.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의『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 용기 있는 패배자, 식민주의 섬기던 이성을 구원하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한 지 500년이 되는 해였다. 원주민 처지에서 보면 그것은 침략이자 재앙이었다.
15~17세기에 근대 세계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이는 지구의 대다수 사람들에겐 식민지배, 전쟁, 출구 없는 저개발과 빈곤이라는 재앙을 의미한다.
1492년은 말하자면 그런 재앙의 연대기에 이정표가 된 해인 것이다.
1992년 스페인을 비롯한 서구세계에서는 신대륙 발견 500년 축제 같은 부끄러운 행사들이 이어졌다.
세계의 원주민들이 항의해 1992년을 '원주민의 해'로 정하도록 유엔에 요청했으나, 서방국가들과 타협한 유엔은 1993년을 '원주민의 해'로 정했다.
40년간 기독교도들이 1,200만 명 이상의 원주민들을 살육하고 파멸로 몰아간 까닭은 단 한 가지, 오로지 황금을 손에 넣겠다는 일념이었다.
엔코미엔다, 스페인 국왕이 스페인인 이주자에게 기독교 교화를 조건으로 인디오들을 부릴 수 있도록 허가한다는, 사실상의 노예제도다.
스페인의 인문주의자, 카톨릭 성직자 후안 히네스 데 세풀베다는 학식을 총동원해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에게 반론을 폈다.
"기독교도들이 인디오들을 복종시켜 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자연법에 따르면, 이성이 결여된 사람들은 그들보다 인간적이고 사리분별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간 중에는 그 자연본성에 의해 주인인 자와 노예인 자가 있다. 저 야만인들은 죽음의 위협에 처할지라도 정복당함으로써 매우 큰 진보를 이룰 수 있다."
인간적, 이성, 사리분별, 진보... 이런 말들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비위가 상할 정도로 전형적인 식민주의 레토릭이다.
하지만 식민주의의 포악성은 이후 500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지금도 우리는 이런 레토릭의 변주곡을 계속 듣고 있다.
17 마르크 블로크의『이상한 패배』- 인간해방을 실현하는 그릇으로서의 국가를 옹호하다.
지금은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을 부르짖는 아베 정권에 의해 일본은 전쟁국가로 전락하고 있다.
反지성주의가 의기양양 거들먹거리고 이성과 교양은 공공연하게 냉소의 대상이 되었다. 황폐한 풍경이다.
"복종은 외면적 형식에 의해 강제된 존경과 거의 언제나 혼동된다."
마르크 블로크는 시민의 자율적 판단과 자발적 참가를 전제로 하는 共和政 체제야말로, 또 바로 그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君主政이나 파시즘 국가를 이길 수 있으며, 또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의 프랑스는 맥없이 나치 독일에게 무너졌다. ☞ 이는 유가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도덕적 정당성과 군사적 우위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고, 별도로 준비해야 한다. 도덕적 정당성이 군사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부국강병은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승자가 되기에는 국민으로서 불완전한 지식과 명석하지 못한 사상에 만족하는 습관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던 게 아닐까?"
그는 프랑스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대상은 프랑스대혁명의 맥락 위에 있는 보편적 인간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그릇으로서의 국가였다.
그 그릇은 이념으로서는 시민 개개인이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공동체다.
그가 사랑한 것은 국가 자체라기보다는 인간해방의 이상이라고 해야 한다.
만일 프랑스라는 국가가 그런 이상을 배반하는 조직이 된다면 그는 프랑스와 싸웠을 것이다.
모든 사상과 행동은 컨텍스트(맥락)와 포지셔널리티(위치)를 빼고는 이해할 수 없다. 공화주의,애국주의라고 개념 규정을 한 단계에서 사고정지를 하는 순간 어떤 사람이 특정한 입장을 선택해서 어떤 행위를 하기에 이르는 인간적 동기에 대한 이해가 배제된다.
그것을 배제한 채 개념만을 얘기하고 개념만이 홀로 걸어다닐 때 그것은 곧바로 형식화하고 권력화한다.
마찬가지로 내셔널리즘이나 페미니즘 같은 용어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 블로크라는 인간에 공감하는 것과 애국주의에 공감하는 것은 같은 게 아니다.
블로크의 애국주의와 조지 부시의 애국주의는 정반대의 것이다. ☞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위대한 애국주의와 천박한 국수주의 둘 다 그저 애국주의일 뿐이다.
분류해서 딱지를 붙이는 것은 허위의 지성이며, 지식의 단편화와 형식화에 가담해 反지성주의에 길을 열어 주는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전 세계에 퍼지는 지적 황폐의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가로놓여 있다. ☞ 맥락의 생략. 현대인의 학습방식이기도 하다.
18. 빈센트 반 고흐의『반 고흐 서간 전집』-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 그 고뇌의 원형.
"가능한 한 좋은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을 다잡고 꾸준히 노력해온 결과 전 생애의 무게를 걸고 다시 한 번 얘기해두자면, 너는 단순한 코로의 화상과는 다른 어떤 사람이다... 너는 내가 아는 한 그런 화상이 아니다. 너는 현실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행동하면서 방침을 정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너는 그런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자신의 가슴을 권총으로 쏜 고흐가 입고 있던 옷에서, 그의 사후에 발견된 동생 태호에게 보낼 유서 초안에 나오는 얘기다.
코로는 당시 가장 비싸게 팔린 풍경화가다. 동생에게 금전 이상의 가치, 예술적 가치에 목숨을 바치라고 전 생애의 무게를 걸고 요구하고 있다.
"이상을 품지 않고 자기실현을 포기하고, 평균적인 삶과 평범한 죽음을 바라는 우리야말로 고흐의 가차없는 고발 대상이 아닐까?" - 사카자키 오쓰로.
만사를 금전적 가치나 사회적 지위라는 척도로 재단하고 서열을 매겨야만 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그런 척도에 맞지 않는 인간, 그런 척도와는 다른 가치를 신봉하는 인간은 고립당하고 고뇌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시대의 고전과 교양을 찾아서 - 대담 : 서경식(저자), 권영민, 이나라, 이종찬.
서경식 : 인터넷 및 스마트폰의 보급 이후 학생들이 긴 문장을 읽거나 쓰는 걸 힘들어 합니다. 매체 환경의 변화로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는 등 장점도 있겠지만, 지식의 파편화,단편화 현상이 대두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이나라 : 일반 고전이 보편적 인간문제를 고민하는 텍스트라면, 선생님의 고전은 본인이 처한 문제에 답을 주는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경식 : 일본에서는 주어 상실의 문제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으면 적절한 답을 내놓질 못합니다. 예를 들면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을 하더라도 누가 일으켰는지 그 주체를 언급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식이지요. 마치 자연현상이 일어나듯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다수의 일본인들은 그걸 편하게 여겨요. 남의 문제로 밀어내면 내 문제로 받아들일 때의 책임을 피할 수 있으니까요. 모든 걸 수동태로 이야기하는 습관도 문제입니다.
이나라 : 유럽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나'에서 소외된 이들, 예를 들면 여성이나 식민지배를 받았던 이들을 다시 불러오려 했습니다... 선생님의 글쓰기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출발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요.
이종찬 : 지금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면, 한편에서는 인문학이 죽어간다고 말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인문학이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들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앞다투어 설파하고 있지요. 정부에서 주도하는 창조경제의 바탕으로도 인문학의 가치가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고요... 인문학이 죽어간다는 담론을 부각시키려는 이들이 인문학과 교수들인 경우가 적지 않아요... 반면 인문학의 융성을 설파하는 입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비판의 기능이 거세된 반쪽 짜리 체제 순응적 인문학에 지나지 않을 때가 비일비재합니다.
서경식 : 일본에서는 1990년대 말에 교양교육의 강화에 대한 사회적인 요구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지시한 대로만 따라 하고 대화조차 되지 않는 학생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소위 외국어를 비롯한 문학,철학 등의 교양교육을 축소하고 실용적인 기술교육을 늘려 가는 경향이 강합니다. ☞ 부국강병을 위해선 오히려 이러한 정책이 바람직하다. 인문학은 개인적으로 추구하도록 해야 할 문제다. 어차피 주체적 인문학은 체제에서 요구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권영민 : 오늘날의 인문학은 지식이나 교양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나'를 복원시키거나 저항의 계기가 되기보다는 '너희는 이거 잘 모르지? 내가 가르쳐 줄께' 식으로 강의하거나 최신 담론을 소개하는, 부정적 의미의 계몽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전문가의 권위를 강화하거나 자기계발서에 활용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의 인문학 열풍은 진정한 인문학과는 거리가 있다고 봐요.
서경식 : 서양에서 계몽이란 중세의 미신이나 마술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계몽이라고 봤지요... 진정한 계몽은 자기 자신이 조금의 빛을 보고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전체가 아니라는 걸 항상 의식해야 하지요. ☞ 계몽이란 신비주의로부터의 해방이다.
권영민 : 물론 훌륭한 강의도 있겠지만, 많은 대중 강연들이 지성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걸 권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웃소싱하는 백화점 인문학의 느낌이 강하지요.
서경식 :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생각으로는 계몽되지 않아요. 수동적이거나 일방적이 아닌 만남의 기회가 필요하지요.
권영민 : 2013년에는 경희대에서 한 학생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하는 강사를 국정원에 신고한 일이 있었습니다.
서경식 : 독일의 대다수는 자신들도 나치스의 희생자였다는 신화를 만들면서 책임을 지워 버렸는데, 일본인 역시 마찬가지지요... 일본에서는 '공정중립'이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어요. 공정중립이라는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중간에 서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아베 정권이 주요 방송사들에게 공정중립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정권에 반대되는 것은 공정중립이 아니니, 그런 걸 보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럼 결국 기득권 세력이 이득을 보게 되지요... 이건 눈에 안 보이는 권력에 전복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위험한 관념이 사회 곳곳에 깊숙이 침투되고 있어요. ☞ 지식인에게는 공정중립이 아니라, 中庸의 道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종찬 : 한국에서는 공개적인 발언을 하면서 자기 발언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덧붙이는 경우가 꽤 있지요. 그거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발언인데 말이예요.
서경식 : 한국에서는 국가나 학교가 동영상 강의를 장려한다고 하더군요... 이는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을 수도 없는 지극히 규격화된 방식이고요.
권영민 : 역설적으로 대학이 존립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흐름에는 지향해야 한다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