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기복신앙이란 무엇인가
기복신앙에서 추구하는 복(福)은 일반적으로 평안과 만족 그에 따르는 기쁨의 상태를 말한다. 변화무쌍한 인생사에서 예측가능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려는 인간의 갈망이 복이라는 개념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복신앙은 일반적으로 자연숭배·조상숭배·샤머니즘 등의 형태로 유지되어온 민간신앙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신앙행위는 유교·불교·도교 등의 고등종교가 들어오면서 이들과 여러 형태로 결합하면서 개념화되었다. 그러나 굳이 유교·불교·도교 등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복에 대한 갈망은 일상화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 새해가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주위 사람들과 `복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나누고 것이 상례화 되어있다.
종교적으로 불교는 삼재팔고(三災八苦)라는 인생의 환난에서 벗어나고자 기복관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유교에서도 오복이나 삼복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공통적인 기복 행위로서 작게는 액막이·축귀의식·부적 등이 있고 적극적으로는 각종 제사나 굿등을 하기도 한다.
민간에서의 기복행위로는 집에 사는 여러 신을 모시는 각종 의식이 있었다. 집에는 다양한 신격들이 있어 이들이 집안의 여기저기를 도맡아 보살펴준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절이 되거나 별식이 생기면 그들에게 바쳤고, 정초의 안택이나 가을 상달고사 때는 이들에게 고사를 지냈다.
이들 신이 보살펴주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들이 복을 받고 편히 살며 집안의 대소사가 평안하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또한 의식주생활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다.
식생활의 경우 명절의 음식에 잘 나타났다. 설날에는 새로운 정신과 몸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복을 빌며 차례도 지내고 세배를 하는데, 이때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만 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또 다른 기복의 행위는 간지(干支)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간지는 10간과 12지를 서로 조합하여 만든 60개의 순서를 통해 우주만물을 주역의 이치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이는 결혼·장례·이사 등 특정 날짜를 잡는 일에 이르기까지 민간생활과 아주 밀접한 것이었다. 특히 사람의 생년·월·일·시의 간지를 사주(四柱)라고 하는데, 사주가 그 사람의 운명을 미리 결정한다는 속신의 발생과 함께 혼인의 택일, 남녀의 궁합을 정하거나 흉일을 피하는 비방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길흉사를 결정하는 각종 재난을 미리 예언하여 이를 피하고자 하는 수단으로도 사주는 이용되었다.
기복행위는 제액(除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세시풍속에 따라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조선 후기의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복에 대한 갈망은 각종 개벽신앙을 가진 신종교 발생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와 같은 외래종교가 유입되더라도 민간에서는 이를 기복적인 성격으로 변형시켜 흡수했다.
2.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문제
근세에 들어온 대표적 외래종교인 기독교도 우리 민족 전통 속에 깊이 뿌리내린 기복신앙을 피할 수 없었다. 한국교회의 기복주의 경향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학술적인 서술보다는 실제적인 예를 통해 한국기독교의 기복신앙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우선 타 종교인도 포스터나 현수막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부흥회를 통해 기복신앙의 주요한 경향을 살펴보고 덧붙여 교회여성의 현실과 기독교인의 고백을 통해 기복주의 현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2-1 부흥회는 일종의 굿?
한국교회의 기복주의의 신앙은 정기적 예배보다는 특별행사를 통해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일상적인 집회와 다르게 특별집회로 불리는 부흥회가 그 대표적인 예다. 여기서 부흥회가 문제가 되는 것은 행사 집행자가 교인들을 상대로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몰입시키며 마치 일종의 굿판 같은 형식으로 진행하는 데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굿판이 참여자들이 가진 잠재된 불안과 불만을 정화시키는 작용을 하지만 이것이 불순한 목적으로 발전될 때는 종교의 순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대개의 부흥회는 교회 건축 등 교회 내적인 필요에 의해 열리는 경우가 많고 철저하게 개인의 기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기독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내' 교회의 식구들의 복락을 비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대학입시를 위한 특별기도회'일 것이다. 해마다 입시 철이 되면 거의 모든 교회가 특별기도회를 갖는다.
기복주의는 헌금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헌금이란 말 그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과 꿈을 지켜 주는 신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바치는 것으로서, 그것을 계기로 더욱더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헌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녀야 할 헌금이 더 많은 물질적 보상을 받기 위한 투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기복주의 경향은 교회내 의사소통의 구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국 교회는 장로교가 대부분이고 회중중심의 교회전통이 있음에도 목회자가 신적인 위상을 가지고 신도들 의해 군림하고 신도들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목사들을 종교전문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무속신앙에서 무당이 가지는 신과의 중재자 또는 권능자라는 인식 때문이다. 실제로 신도들에게는 목사들의 말이 지상 명령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러한 현상은 신도들의 신앙관을 왜곡시키고 신과의 근본적인 만남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2-2 한국교회여성의 현실
한국 교회의 70%이상을 차지하는 교회여성들은 거의 모두가 다음과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
거의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가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고 주중에는 성경 공부 또는 교회청소를 하고, 수요일 저녁예배, 금요일 속회(소모임), 금요 철야기도회에 참석한다.
때때로 심방(교인 가정방문)에 동행하고, 일요일에는 성가대 아니면 교인 점심식사 준비로 예배도 제대로 참석도 못하고, 점심시간 끝나서 오후 성경공부 참석하고 저녁식사까지 해야 하는, 그리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현재 한국 교회 여성들의 전형적 모습이다. 우리는 이 여성의 모습에서 여성들의 교회생활이 가사노동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교회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지만 교회운영인 다스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서는 배제된 모습을 본다. 더욱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이 맹종 적으로 전념하는 태도는 한국 교회 여성문제를 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 여성의 현실을 적절하게 표현하라면 매우 상반되는 행동을 요구받으며 사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생활은 기복신앙이 지배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교회여성들은 부지런히 움직여서 안락한 가정을 꾸미고, 지쳐서 들어오는 가족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며,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또 남편을 잘 내조하여 사회적으로 출세시키는 등 완벽한 가정책임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들 여성들은 자녀들에게 비싼 돈을 들여 과외공부를 시키고, 또 세력가 부인들과 접촉하여 연줄을 닿게 하고, 새벽기도에 나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등 가정의 안락함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즈음은 여성들에게 경제력도 요구한다. 부동산 정보도 많이 알아야 하고, 주식투자도 잘하고 좋은 물건을 싸게 구입하고 여유 돈도 잘 굴리는 재산 증식 기술까지 요구한다. 사회적으로도 이름 있는 부인이 되기를 바란다. 가정에서 남편에게 잘 복종하고 순종하지만 밖에서는 똑똑한 사람이 되어서 야무지고 확실하게 상대편을 이기는 당찬 여성이기를 원한다.
전통적 유교적 여성상과 여성의 역할을 이상화하고 그것에 고정되기를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슈퍼우먼이 되어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모두 책임지는 존재로 요구받는 것이 현재 한국 교회 여성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물질 중심적 사고에 집착하게 된다. 여성들이 소비생활의 담당자며 먹고사는 문제를 주관하며 경제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게 되어 물질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다. 물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탐욕적 태도로까지 이어진다. 여성들이 가족의 출세와 물질의 풍요를 강구하는 기복신앙을 신앙행태의 특성으로 하는 것도 이런 연유다.
기독교가 소외된 자와 노예와 같았던 여성들의 해방을 추구했던 종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목적이 오직 기복적 기도에 응답하시는 신에게 고백하게끔 하는 것은 한국기독교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2-3 한 기독교인의 고백
이글은 한때는 철저한 기복적인 기독교인이었다가 지금은 생명농업의 일가를 이룬 강문필씨(방주공동체 대표)의 글이다.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중략) 14년 전 상주에서 이곳(울진)으로 와서 4년 간 다니던 광산을 그만두고 농업을 시작한 지가 10년을 훌쩍 넘었다. 광산 생활의 방탕이 도에 지나치다 보니 가정마저 파탄 일보 직전에 이르게 되어서야 새로운 생활의 도전을 위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는데 초기에는 요즈음 교회들이 흔히 저지르는 기복 신앙과 신비주의에 도취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지독스럽게도 보수적인 문화 속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성파 예수꾼이 되었다.
한두 해쯤 열성적으로 교회에 집착하면서 스스로 '이만하면 제법 하느님이 인정할 만한 예수쟁이가 되었다'고 자부할 만큼 교회에 충실했으니 이제 뭐든지 시작하기만 하면 하늘에서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땅 3천여 평을 어렵게 구입하여 농사를 시작했다.
첫 해는 농토에 배추를 심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부디 배추가 금추가 되어 떼돈을 벌게 하여 교회에 헌금도 많이 바치고 어려운 이웃도 돕게 하여 주십사' 하고 기도하면서 농약을 무진장 쏟아 붓고 애정을 쏟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 해는 배추 값이 똥값이 되어 씨앗 값도 못 건지고 몽땅 버리게 되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3년을 반복해서 채소 농사를 지었는데 그렇게도 고대했던 축복 대신 결국 땅값의 여섯 배가 넘는 빚더미를 안게 되었다.
다시 궁지에 몰리는 신세가 되어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많이 하곤 했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내가 시작한 농업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반성해 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신의 축복을 갈망하는 한 인간이 신성한 자연에 대해 저지른 행위는 실로 가가 막힐 정도로 한심했다. 돈이 곧 축복인 줄만 알고 농약 범벅을 만들어 이웃에게 팔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농약 냄새 가시지 않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것을 과연 하느님이 어떻게 보았을 것인가?
이렇게 3년을 견뎌 오며 다음 해에 다시 새봄을 맞게 되었을 때, 거대한 빚더미에 짓눌린 처지에 농사 자금을 마련할 길도 없던 어느 날 나는 지난해에 쓰다가 남은 농약 봉지를 이웃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몽땅 주어 버렸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농약을 하느님 몸의 일부분인 땅에다 파묻어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달리 처분할 방법이 없었기에 고작 한다는 짓이 '그 친구는 어차피 농약을 써야 할 테니까'하는 생각으로 그런 실수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때부터 맨 땅에 씨앗을 뿌려 놓고 퇴비마저 마련할 돈이 없으니 그냥 제 땅에서 돋아나는 풀을 뽑아 다시 돌려주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한계에 이르고 보니, '욕심을 버리자'는 성서의 가르침을 싫어도 따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늘에서 주시는 대로 먹으리라고 체념해 버리자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다. 풀인지 곡식인지 분간할 수 없도록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뽑아 밭고랑에 눕히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흥얼흥얼 노래도 곁들이며 히죽히죽 웃다 보니 영락없는 미치광이 행색인지라, 지나가던 이웃 사람들이 '저 사람 교회에 지나치게 열심이다 싶더니 마침내 실성을 해서 저런다'고 하면서, 아예 나하고는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다. 인근 학교의 선생님들을 상대로 하숙을 쳐서 가정을 꾸려 가던 아내도 틈틈이 밭일을 거들게 되었는데 일을 하던 아내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나 차가 지나가게 되면 아예 밭고랑에 엎드려 숨어 버렸다. 남들이 빈정거리는 것이 창피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지은 첫해 농사라야 결과가 뻔한 노릇이라 겨우 몇 됫박의 잡곡과 식구를 먹을 만한 채소와 양념 정도였다. 늘어가는 빚은 갚을 길이 없고 가세는 점점 더 기울어졌다. 늘어가는 빚은 갚을 길이 없고 가세는 점점 더 기울어졌다.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고 보니 아내가 소중히도 간직하고 있던 결혼 반지와 아이들 돌 반지 등을 가리지 않고 헐값에 팔아 양식과 바꿔 먹으면서 쌀이 금보다 귀함을 깨닫게 되었다.(울진 '서면 쌍전에서 사는 이야기' 중)
3. 기복신앙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난 천년동안 한국에서 샤마니즘에 기반한 기복신앙은 한국종교에 큰 영향을 끼쳤고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있다. 물론 긍정적인 요소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 폐해는 너무나 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은 21세기에는 접어들면서 점차 퇴조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 예로는 카리스마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교인들을 사로잡았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일반 성도들의 저항으로 이전보다 영향력이 줄고 합리적이고 대화형 목회자들이 환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인들의 학력과 의식이 높아진데다 그동안 성역으로 간주해 종교비판을 자제하던 각 언론들이 각종 비리를 폭로하면서 일정부분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종교의 기복주의가 완전히 사라질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상당기간 그 힘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된다.
기복주의의 한 변형인 자본주의적 물신주의가 종교 내에 새로운 힘으로 작용하면서 세속적 계급질서가 종교조직 안에까지 관철되어 '돈이 호령하고 위세를 부리는' 현상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가 헌금과 시주 등 신자들의 재정적 기여에 대해 강조하는 정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그럴수록 주요 종교의례들은 '성스런 모금의 시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정화수를 떠놓고, 혹은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묵주 혹은 염주를 손에 쥐고 졸면서 기도를 바치는 할머니의 모습은 설사 그 기도가 고전적 기복주의는 정겹게 느껴질 정도이다.
아직도 많은 종교인들은 많은 이들은 자신의 헌금이 '천국보험'으로 실효성 있게 쓰이고 있다고 '믿고 싶어하며', 자신의 헌금이 풍성한 축복과 구원을 위한 투자금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많은 이들은 자기들이 낸 헌금이 돈 관리에 노회한 성직자들에 의해 1/10 정도만 하늘나라로 보내지고 나머지 9/10는 지극히 세속적인 용도로 쓰여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실망하게 되는 일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년 11월 불교·천주교·기독교의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종교NGO네트워크가 헌금의 투명한 관리와 제대로 된 쓰임새를 주장하고 나섰는데 이들이 얼마나 많은 평신도의 지지를 얻어내고 평신도를 운동으로 동원하는 데 성공할지가 관건이 되고 있다.
즉 기복신앙 또는 물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의 의식변화도 중요하지만 평신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평신도들은 종교 내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개발하여 교단 내에 파급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각 고등종교들이 태동할 때 해방 메시지를 통해 미신이나 기존 종교의 잘못을 극복해 나갔던 것처럼 지금 이 시점에서 각 종교인들은 일상속에서 생활문화운동을 통해 각 종교 내에 남아있는 전근대적 가치관을 타파하며 새로운 종교운동을 펼쳐나갈 필요가 있다.
즉 많이 가지는 것보다 덜 소유하는 것이 행복하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인식을 가진다면 기복신앙의 폐해는 많이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삶은 당장의 고통과 불편함이 따르겠지만 일상화되면 이러한 삶이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행히 이런 움직임이 작게나마 확산되고 있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살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삶이야말로 종교인의 본 모습이며 한국종교의 중심과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한국종교의 새 길이 열리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