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모든 討論術의 기초에 대하여.
"討論術은 진리를 찾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것은 검객이 결투를 초래한 언쟁에서 누가 옳은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모든 논쟁의 본질이 무엇인지, 즉 논쟁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내용을 주장했을 때, 그것을 반박하는 데는 두 가지 화술과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논쟁 내용과
연관된 화술
☞ 가정,주장,사례에 대한 반박.
논쟁 상대방과
연관된 화술
상대방이 인정한 사실을 근거로 하는 화술.
상대의 주장이 내용상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한다.
혹은 상대방이 이미 인정했거나 주장했던 내용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진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야 한다.
여기서는 단지 상대적인 입증일 따름이며, 객관적 진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직접 반박
상대 주장의 근거를 공격하는 방법. 상대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대전제,소전제를 문제삼음 - 상대의 주장이 의존하고 있는 여러 근거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 주거나,
추론과정에 문제제기 - 그 근거는 인정하되 이 근거로부터 그의 주장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간접 반박
상대 주장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해 공격하는 방법. 상대의 주장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간접논증 - 일단 상대의 주장을 옳다고 받아들인다. 그런 다음, 옳다고 인정된 상대의 또 다른 주장과 연결해 이것을 어떤 결론을 위한 전제로 사용할 경우, 이로부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 준다. 그러면서 상대의 주장이 자가당착에 빠져 있거나 , 아니면 그의 또 다른 주장과 배치되기 때문에 그 결론이 분명히 거짓임을 밝혀 낸다. 이로써 그의 주장은 내용상으로나 그가 인정한 다른 사실과의 관계에서 모두 거짓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처음에 옳다고 인정한 그의 주장 역시 틀린 것이 된다. 왜냐하면 잘못된 전제로부터 항상 잘못된 주장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전제로부터는 오직 올바른 주장만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반증 - 상대가 주장한 개념에 포함되는 여러 개별적인 사례들을 직접 증명함으로써 그의 주장의 보편성을 반박한다. 즉 상대의 주장이 이 개별적인 경우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틀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모든 논쟁의 기본골격이다. 모든 논쟁은 근본적으로 이런 기본구조로 소급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논쟁은 진실되게, 즉 참된 근거를 가지고 진행될 수도 있고, 단지 허구적으로, 즉 거짓 근거를 가지고 진행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이 참된 근거이고, 무엇이 거짓 근거인지는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논쟁이 길고 집요하게 늘어지는 것이다.
이제 나는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의 여부를 고려하지 않는 논쟁기술들을 보여 줄 것이다. 왜냐하면 객관적 사실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쟁이 끝나 봐야 비로소 판가름나게 될 것이다.
논쟁과 토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토론 당사자들 사이에 동의하는 접점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이것을 기초로 하여 그들은 당면한 문제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제시된 첫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과는 논쟁을 벌일 수 없기 때문이다.
1부. 강하게 공격하는 기술
1. 동기부여를 통해 의지에 호소한다.
실제로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면 다른 기술은 모두 쓸 필요가 없다.
이 기술은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티브(동기부여)를 통해 의지에 호소한다.
이 기술을 사용한다면, 우리 견해가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은 물론이고 그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청중들까지도 금방 우리의 견해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10그램의 의지가 50킬로그램의 이성이나 확신보다 무게가 더 많이 나가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비록 상대의 견해가 타당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상대에게 줄 수 있다면, 그는 실수로 뜨거운 쇳덩어리를 잡았을 때처럼, 얼론 자신의 견해를 내려놓게 될 것이다.
예컨대 어떤 철학자가 특정 철학적 도그마를 옹호할 경우, 우리는 그것이 그가 속한 교단의 근본교리와 간접적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인식시켜 주면 된다. 그러면 그는 자기 주장을 금방 거두어들일 것이다.
그러면 모든 청중들은 상대의 논리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근거가 없거나 불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 주장은 그것이 아무리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올바르며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의견에 동조하는 합창을 부를 것이다.
2.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위를 최대한 활용한다.
여러 근거를 대는 대신 상대의 지식수준에 따라 자신이 누리는 권위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남의 말을 그냥 믿으려고 한다." - 세네카.
그러므로 상대로부터 존경을 받는 권위를 누리고 있을 때, 우리는 논쟁에서 쉽게 이길 수 있다. 상대의 지식과 역량이 모자랄수록 그만큼 우리가 누리는 권위는 더 커지게 된다.
반면 상대의 지식과 역량이 아주 뛰어날 경우, 그에게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위는 작거나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는 기껏해야 자신이 거의 또는 전혀 모르는 분야의 전문가들이 누리는 권위 정도만 인정해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불신의 눈길로 말이다.
이에 반해 평범한 사람들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들은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일 자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그 일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그런 전문적인 일을 가르치는 사람들 역시 그 일에 대해 자세하게 많이 아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 또한 모른다. 왜냐하면 전문적인 일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대개 남을 가르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 그들은 존경할 만한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적당한 권위가 없을 경우에도, 마치 그런 권위가 있는 양 행세하며, 어떤 권위자가 전혀 다른 의미나 전혀 다른 맥락에서 주장했던 것을 인용해야 한다. 상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의 권위는 대개의 경우 가장 좋은 효과를 낸다.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아무런 뜻도 없는 희랍어나 라틴어 몇 마디에도 존경심을 느끼게 된다.
필요할 경우 권위를 의도적으로 왜곡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날조할 수도 있고, 또 자기 머리 속에서 완전히 꾸며 낸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처럼 교양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책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으며,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보편적 편견 역시 권위처럼 사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것처럼, 대체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옳게 보이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견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순간, 그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그곳이 어디든 앞서가는 양을 뒤쫓아가는 양떼다. 선례는 그들의 생각은 물론이고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들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한 가지 견해의 보편성이 그들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하다는 사실은 매우 이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선례에만 의존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기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견해를 가지고 있다." - 플라톤. <국가론>.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몇몇 선택된 사람들 뿐이다. 즉 평범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든 것이라고는 허튼 생각 뿐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공략하면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한 가지 견해가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의견의 참됨에 대한 증명은커녕, 그것이 참이 될 개연성의 근거도 될 수 없다.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은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1) 시간상의 거리가 그 견해의 보편성이 가지고 있는 증거력을 빼앗아 버린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예전에 한때 보편적 진리로 간주되었던 옛날의 모든 잘못된 생각들을 다시 진리라고 주장해야만 할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혹은 모든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카톨릭을 다시 재건하려는 것 등이 그 예다.
2) 공간상의 거리 역시 동일한 기능을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불교,기독교,이슬람교 신도들이 생각하는 보편적 종교관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보편적 견해라고 부르는 것도 잘 살펴보면, 두세 사람의 견해일 따름이다. 보편적 견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잘 관찰해 본다면, 우리는 이런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애초에 그런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제기하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지 두세 사람 정도에 불과하며, 보통사람들은 그들이 그 견해에 대해 철저히 점검했을 것이라고 쉽게 믿어 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우선 몇몇 사람들이 그들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히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 후에 다시 더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 이 견해를 믿었던 사람들을 믿게 된다.
그들의 게으름은 스스로 그 견해를 검증해 보는 번거로움보다는 그것을 곧장 믿어 버리는 것을 더 선호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게으르며 모든 것을 쉽게 믿어 버리는 추종자들의 숫자는 나날이 불어난다. 일단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 견해에 동조하고 있는 까닭에, 이 견해의 추종자들은 그것이 충분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나머지 사람들도 普遍妥當한 것으로 간주되는 그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普遍妥當한 견해애 반대하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체하는 건방진 놈으로 취급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 견해에 동의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의무가 된다. 그리고 지금부터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도 침묵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나름의 고유한 의견이나 판단을 내놓을 능력이 전혀 없고, 앵무새처럼 남의 의견을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만큼 더 역설적이고, 편협하게 이 견해의 방어자 노릇을 하게 된다. 그들이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증오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들과는 다른 견해를 가졌기 때문도 아니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오만함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이런 의견 개진이나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기 견해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그 어떤 방법이 남아 있겠는가!
사정이 이렇다면 수억 명의 인간이 똑같이 내는 목소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수백 명의 역사가들이 쓴 책에서 발견하는 한 가지 역사적 사실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것을 잘 살펴보면, 그들 모두 다른 사람들의 것을 계속 그대로 베껴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계속해서 역추적해 간다면, 모든 것은 결국 단 한 사람의 진술로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과 논쟁이 붙었을 때 보편적인 견해를 사용할 수 있다. 평범한 머리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 논쟁을 벌일 경우, 그들 둘이 똑같이 선택하는 무기는 대부분 권위이며, 이것을 가지고 그들은 서로 치고 받으며 싸우게 된다.
머리가 좀더 좋은 사람이 평범한 사람과 논쟁을 벌일 경우에도, 가장 추천해 주고 싶은 것은 이 무기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상대방이 보이는 빈틈에 따라 무기를 선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유형의 평범한 인간은 근거라는 무기 앞에서는 제대로 생각하지도, 스스로 판단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원래 법정에서는 오로지 권위로만 논쟁이 벌어진다. 여기서 권위란 법률의 권위를 말하며, 이것은 분명하게 확정되어 있다. 여기서 판단력이 담당하는 일은 주어진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법률, 즉 권위를 찾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討論術을 이용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소송에 계류된 안건과 법률이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을 경우, 이것들이 서로 이가 맞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이리저리 돌려 맞춤으로써 討論術은 자신의 활동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반대의 경우에도 討論術은 충분히 자기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3. 논증이 안된 내용을 旣定事實化하여 전제로 삼는다.
순환논법이란 마땅히 먼저 증명되어야 할 것 같은 주장을 旣定事實化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허구적 논증기술이다. 우리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순환논법을 사용할 수 있다. 즉 증명되지 않거나 아직 증명되어야 할 명제를 이용해 다른 명제를 증명하려는 방법이다.
이처럼 아직 논증되지 않은 내용을 旣定事實化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1) 서로 다른 명칭을 자의적으로 혼용하거나(기사의 명예 → 좋은 평판, 처녀의 순결성 → 미덕), 서로 바꿀 수 있는 개념을 자기 마음대로 섞어 사용하는 것(척추동물을 적피동물로)이다.
2) 개별적인 문제를 보편적인 문제인 것처럼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예컨대 의학의 불확실성을 증명하면서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불확실하다고 旣定事實化해 버리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두 가지 사실이 서로 대립할 경우, 한 가지 사실만을 증명하고, 이를 근거로 해 다른 사실도 旣定事實로 만들어 버린다.
자기 주장의 보편성을 입증하려면, 우선 각각의 개별적인 내용에 대해서 상대의 시인을 받아 내야 한다.
4. 자기에게 유리한 비유를 신속하게 선택한다.
아직 자기만의 고유한 명칭이 없어 비유를 통해 특징 지워야 하는 보편적인 개념에 대해 논쟁이 붙었을 경우, 자기 주장을 펴는 데 유리한 비유를 신속하게 선택해야 한다. ☞ 용어선점 효과.
예컨대 스페인에서는 두 개의 정당을 지칭하는 이름이 있는데, 노예당과 자유당이다. 이 이름을 선택한 쪽은 분명히 후자, 즉 자유당이다.
프로테스탄트란 이름은 프로테스탄트 자신들에 의해 선택되었고, 복음주의자라는 말 역시 복음주의자들이 직접 선택한 명칭이다. 하지만 이단자라는 이름은 카톨릭교도들이 선택한 이름이다.
이것은 좀더 실제적인 내용을 지칭하는 명칭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상대가 기존의 내용을 조금 개선한 변경안을 내놓으면, 기존의 것을 완전히 뒤엎은 혁명이라는 표현으로 바꿔 말해야 한다. 이 단어에 대한 저항감을 가진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이런 제안을 내놓았을 경우, 변경에 대한 반대로 기존질서, 그리고 혁명에 대한 반대로 프랑스산 고급포도주(옛 것이 좋음)라는 명칭을 사용해야만 한다.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숭배 또는 공식적인 교리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도, 이 명칭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다, 경건하다고 말할 것이고, 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광신이나 미신이라고 말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 기술은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순환논법이다. 즉 한 사람이 처음에 자신이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는 바를 먼저 말로 표현하거나 이름을 붙이고 나면, 이것을 분석,판단함으로써 이 기술은 이루어지게 된다.
말하는 사람은 종종 자신이 사물에게 붙인 이름을 통해 자기 의도를 미리 드러내기도 한다. 이 때문에 똑같은 성직자들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수행자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땡초라고 부른다.
5. 불합리한 반대 주장을 함께 제시해 兩者擇一하게 한다.
상대가 우리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원래보다 더 불합리한 반대주장을 함께 제시하고 그에게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이때 이 반대되는 내용을 큰 소리로 강조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그는 스스로 논리의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것에 비해 훨씬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우리의 주장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 상대를 兩者擇一 프레임 속에 가두기.
예컨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우리 주장을 상대가 시인할 수 밖에 없게 만들려면, 상대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아니면 복종하지 말아야 합니까?"
또는 상대가 어떤 사실에 대해 자주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주라는 말을 적은 경우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많은 경우로 이해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많은 경우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검정색 옆에 회색이 있으면, 회색이 희다고 말하는 반면에, 회색이 흰색 옆에 있으면, 회색을 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6. 내용이 없는 말을 심오하고 학술적인 말로 둔갑시킨다.
내용이 없는 말들을 기관총처럼 계속 퍼부음으로써 상대를 놀라 당황하게 만든다. 이 기술은 괴테의 다음의 구절에 근거한다.
"보통사람들은 아무 말이나 들어도 그 속에 뭔가 생각할 게 있다고 믿지요." - 쾨테. <파우스트>.
상대가 은근히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고 있거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으면서도 마치 다 이해하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데 익숙해 있는 사람일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겉으로 보았을 땐 심오하거나 학술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아무 내용이 없는 말들을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내뱉고, 이것을 우리 견해의 명백한 증거로 제시함으로써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다.
최근 몇몇 철학자들이 독일국민 전체에게 이 기술을 아주 성공적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하다.
7. 상대방의 대답을 근거로 자기 주장의 진실성을 확보한다.
논쟁이 좀 어렵고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자기 의견을 상대에게 정확하면서도 분명하게 전달하려면, 주장을 제기하고 그것을 입증해야 할 사람은 상대방에게 질문을 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입에서 직접 나온 대답을 근거로 자기 주장의 진실성을 추론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답식 토론방식은 소크라테스 때부터 많이 사용되었다. → 8장, 25장도 문답식 토론방식과 연관된다.
자신이 원래 상대방에게 받아 내려고 했던 자백(시인)이 무엇인지를 숨길 때도 느닷없이 많은 질문을 자세하게 하라.
반면 상대방에게서 시인을 받아 낸 것들을 토대로 하는 논증은 신속하게 진행하라. 왜냐하면 이해가 느린 사람들은 우리의 논증을 제대로 쫓아오지 못하고, 또 논증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오류나 허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8. 예!라는 대답을 얻어낼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논증하기 위해 상대로부터 예!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에 대해, 상대가 의도적으로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 같은 분위기를 눈치챘다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상대에게 물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그에게 마치 우리가 원래 의도한 것과는 반대되는 내용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그에게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민에 빠지게 만들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으려고 하는지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9.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다.
상대를 자극해 화나게 만들어라. 화가 난 상태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는 그에게 노골적으로 부당한 짓을 하거나, 그의 말에 트집을 잡으면 된다. 즉 뻔뻔스러워져야 한다.
10. 말싸움을 걸어 무리한 주장을 하도록 유도한다.
항변과 말싸움은 상대를 자극해 지나치게 무리한 주장을 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변을 통해 상대를 자극함으로써 원래는 그 자체로 진실이거나 어느 정도의 제한조건 하에서 진실인 그의 주장이 진실의 한계를 뛰어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리가 상대의 이런 과장된 주장을 반박하면, 마치 우리가 상대의 원래 주장까지도 반박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반면 우리는 상대의 항변에 자극되어 과장된 주장을 하거나 자기 주장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쪽으로 말려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상대 역시 기회만 있으면 우리 주장을 원래보다 확대시키려고 나올 것이다. 우리는 상대의 이런 계략에 대해 지체없이 제동을 걸고,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우리 주장의 경계선 안으로 되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런 한도 내에서 말한 것이지, 그 이상의 뜻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11. 뜻밖의 화를 낸다면 그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우리가 제기한 어느 논거에 대해 상대가 전혀 뜻밖의 화를 낸다면, 우리는 이 논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상대의 화를 돋우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가 그의 사고과정의 약점을 찾아냈다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짐으로써 우리는 그에게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12. 상대방의 침묵은 곧 상대방의 약점이다.
우리의 질문이나 논거에 대해 상대가 직접적인 대답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다른 내용을 질문하거나, 간접적인 답변이나, 내용과 전혀 관계가 없는 말로 피해 나가면서 다른 곳으로 화제를 전환하려고 할 때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대의 뭔가 수상한 부분을 건드렸다는 확실한 신호다.
즉 이것은 우리의 질문과 연관해 그의 말문이 갑자기 막혔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드린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상대가 이 약점으로부터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건드린 약점이 무엇인지 아직 잘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다.
2부. 더 강하게 반격하는 기술
13. 상대방의 주장을 최대한 넓게 해석해 과장한다.
상대의 주장을 원래 의미보다 더 넓게 해석하고, 가능한 한 넓은 의미로 과장해서 받아들인다. 반면 자신의 주장은 가능한 한 좁게, 그 의미경계를 제한한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로 확대 해석할수록 그만큼 상대의 공격을 받을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대의 이런 작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토론의 쟁점이나 논쟁상황을 상대에게 정확하게 밝혀 두어야 한다. 우리가 자기 주장을 원래 의도보다 좁게 제한한다면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14.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교묘하게 반박한다.
이음동의어는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는 두 개의 다른 낱말인 반면, 동음이의어는 같은 낱말을 사용하지만 두 가지 서로 다른 개념을 갖는 단어다.
이것은 상대의 주장을 단어의 동일성 외에는 토론의 내용과 전혀 연관성 없는 내용으로까지 확대 해석한 다음, 이것을 분명하게 반박함으로써 상대의 주장을 물리친 듯이 보이게 만드는 기술이다.
"모든 빛은 꺼질 수 있다. 오성은 빛이다. 오성은 꺼질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빛이라는 낱말이 한 번은 원래 의미대로 사용되었고, 다른 한 번은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15. 상대적 주장을 절대적 주장으로 바꿔 해석한다.
조건을 달고 제기된 상대의 상대적 주장을 보편적,절대적 주장인 것처럼 해석하거나 혹은 최소한 상대의 이런 주장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파악한 다음,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의 주장을 반박한다.
13장,14장,15장의 세 가지 討論術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즉 상대가 원래 우리가 제기한 주장과는 다르게 해석하고, 이에 반박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이런 식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는, 그의 추론과정의 논리적 일관성을 공격해서 무너뜨려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상대의 반증에 대해 그의 논리추론과정을 문제 삼는 직접적인 반박이다.
16. 전문지식이 부족한 청중들을 이용해 반박한다.
이 기술은 주로 전문지식이 있는 학자들이 일반 청중들 앞에서 논쟁을 벌일 때 사용할 수 있다. 논쟁의 내용과 연관된 논거나 논쟁상대와 연관된 논거 둘 다 가지고 있지 못할 경우, 우리는 청중들을 향해 말도 되지 않는 이의제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이의제기가 전혀 타당성이 없다는 것은 오로지 전문가만이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상대는 전문가이지만 청중들은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청중들의 눈으로 볼 때 상대는 패배한 것이 된다. 더구나 우리의 이의제기가 상대의 주장을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청중들은 금새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고, 청중들을 쉽게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이의제기가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상대는 길고 지루한 설명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 여러 가지 과학법칙이나 그 밖의 문제들을 들춰 내야 한다. 하지만 청중들은 그의 말에 쉽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17.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모순되는 지점을 찾는다.
상대가 주장을 펼칠 때, 우리는 그의 주장이 어떤 방식으로든, 안 되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라도, 그가 이전에 주장했거나 시인했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지, 혹은 그가 칭송하고 인정하는 학파나 종파의 원칙, 또는 이 종파의 신봉자들의 행동, 심지어 진실하지 못한 사이비 추종자들의 행동이나 그런 주장을 파는 상대의 행동과 모순되지 않는지의 여부를 조사해 봐야 한다.
예컨대 그가 자살을 옹호했다면, 우리는 지체없이 '그러면 왜 당신을 목을 매지 않습니까?'라고 반박하면 된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어쨌든 상대의 주장을 저지할 수 있는 트집거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다.
18. 상대방의 논거를 역이용해 반격한다.
상대의 논거를 역이용하는 기술을 쓰면, 상대를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
이것은 상대가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논거를 역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이다.
예컨대 상대가 '그는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므로 정상참작이 필요합니다'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상대의 이 논거를 역이용해 다음과 같이 역공을 펼 수 있다. '바로 그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따끔하게 혼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런 나쁜 버릇에 물들지 않을 테니까요.'
19. 단 하나의 반증사례만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보편적 결론을 추론해 내기 위해 귀납법은 수많은 사례들을 필요로 한다. 반면 현행법 체포식이라는 논증방법은 제기된 보편적 결론에 부합되지 않는 단 한 가지 사례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그 결론은 무너지고 만다. 그와 같은 한 가지 사례를 우리는 반증사례라고 한다.
예컨대 '반추동물은 모두 뿔이 나 있다'는 주장은 낙타라는 단 한 가지 반증사례만으로도 격퇴시킬 수 있다.
반증기술은 보편적 진리를 이용하는 경우인데, 보편적 진리의 중심개념에는 포함되지만, 보편적 진리로는 간주되지 않는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상대의 주장을 물리치는 기술이다. 이것은 단순반증을 통한 간접반박 기술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때 속임수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가 반증사례를 제시할 경우 다음과 같은 점을 조심해야 한다.
1) 제시된 사례가 현실적으로도 참인지 여부 - 수많은 기적이나 유령 이야기 등 현실세계에서는 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례들이 문제해결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2) 제시된 사례가 지금 토론하고 있는 내용의 진리개념 안에 실제로 속해 있는지 여부 - 단지 겉으로만 진실처럼 보이는 사례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예리한 구분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3) 제시된 사례가 지금 토론하고 있는 내용의 진리성과 실제로 모순되는지 여부 - 이것도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20. 사안을 일반화하여 보편적인 관점에서 반박한다.
상대가 우리에게 자기 주장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보라고 분명하게 요구했지만, 이에 대한 특별한 이의제기 거리가 없을 경우, 우리는 사안을 일반화해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것을 반박하면 된다.
예컨대 왜 특정한 물리학 가설을 믿지 않는지에 대해 말해야만 할 경우, 우리는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의 허위성에 대해 말하고 잡다한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면 된다.
21. 상대방의 주장을 이미 반박된 범주 속에 집어넣는다.
우리와 대립되는 상대의 주장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간단하게 물리치거나 아니면 최소한 의심스럽게 만들 수 있다. 즉 그것은 둘이 서로 유사성이 있거나 아니면 느슨하게나마 서로 연관성이 있다면, 상대의 주장을 사람들이 혐오하는 범주 속에 넣어 버리는 방법이다.
예컨대 "그것은 관념론이야... 그것은 스피노자주의야... 그것은 범신론이야... 그것은 자연주의야... 그것은 무신론이야... 그것은 합리주의야... 그것은 유심론이야... 그것은 신비주의야..." 등등.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가정하고 있다.
1) 상대의 주장이 이 범주와 동일하거나 최소한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오! 우리는 그것을 벌써 다 알고 있다."
2) 이 범주는 이미 반박된 것이며, 따라서 어떤 진리도 담을 수 없다.
22. 틀린 증거를 빌미로 정당한 명제까지도 반박한다.
상대가 내용상으로는 정당하지만, 다행히 그 주장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잘못 선택했을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이 증거를 손쉽게 반박하고, 이것을 그의 주장에 대한 내용상의 반박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이 기술은 논증 상대와 연관된 논증을 논쟁내용과 연관된 논증으로 바꾸어 제기하는 것이다.
이때 상대나 그의 편 사람들이 올바른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논쟁에서 이기게 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면서 너무 쉽게 반박당할 수 있는 증거를 들이대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것은 형편없는 변호사들이 사건 내용상 충분히 승산이 있는 소송에서 패소하게 되는 경우와 같다. 그들이 지게 된 이유는 그 사건의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법률을 통해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했으며, 여기에 알맞은 법률이 그들에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23. 상대방의 궤변에는 궤변으로 맞선다.
상대가 순전히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거나 궤변에 가까운 논증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면, 상대방 논거의 허구성과 함정을 낱낱이 파헤침으로써 그 논거를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의 이론 논거에 대해 우리도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고 궤변에 가까운 반증으로 맞서 물리친다면, 그것이 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대가 논쟁상대와 연관된 화술로 나온다면, 똑같이 그것을 논쟁상대와 연관된 반증으로 물리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안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오랜 시간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가능하면 논쟁상대와 연관된 화술을 구사하는 것이 훨씬 더 시간이 절약된다.
3부. 결론을 이끌어 내는 기술
24. 상대방이 나의 결론을 미리 예측하지 못하게 한다.
어떤 결론을 내리려고 할 경우, 상대가 그것을 미리 예측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대화 중에 눈치채지 못하게 상대의 정신을 혼란시켜 당신이 내세운 전제들을 개별적으로 인정하게 만들어라.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상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트집을 잡으려 할 것이다.
혹시 상대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면, 그 전제들에 대한 전제들을 또 제시하라.
즉 결론이 다음 삼단논법의 전제가 되는 前삼단논법을 만들어라.
그 다음 이와 같은 前삼단논법의 전제들에 대해 순서를 따지지 말고 뒤죽박죽 뒤섞어 상대의 시인을 받아 내라. 즉 상대에게서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시인을 받아 낼 때까지 당신의 속임수를 숨겨야 한다. 그러니까 당신의 목적이 먼 곳에서부터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25. 결론을 이끌어 내는 질문은 두서없이 한다.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필요한 질문들은 체계적이며 질서정연하게 할 게 아니라, 중구난방식으로 하라. 그러면 그는 우리가 그 질문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채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해 아무런 사전대비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로부터 얻어낸 대답들을 이용해 여러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그의 대답을 이용해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자신의 기술을 상대에게 위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기술은 앞의 24번 기술과 비슷하다.
26. 참 전제가 안 통하면 거짓 전제로 결론을 도출한다.
상대가 참인 전제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자기 주장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거짓 전제를 사용할 수 있다.
즉 상대가 이 전제의 진실성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해 우리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그 자체로서는 거짓이지만, 논쟁상대와 연관해서는 참이 되는 전제들을 내세우고, 상대의 사고방식을 이용해 우리 주장의 참됨을 인정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참 전제로부터 거짓결론은 결코 나올 수 없지만, 참된 결론은 거짓 전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대의 거짓 주장을 또 다른 거짓된, 하지만 상대는 참이라고 믿고 있는 주장을 통해서 반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논쟁에서 우리의 상대는 바로 그이며, 따라서 그이 사고방식을 이용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가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종파의 추종자라면, 그를 상대로 우리는 그 종파의 잠언을 논쟁의 전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27. 거짓추론과 왜곡을 통해 억지 결론을 끌어낸다.
상대가 사용한 개념에 대한 거짓추론과 왜곡을 통해 상대의 주장 속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상대의 의견도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의 허무맹랑하고 위험스럽기까지 한 주장들을 억지로 끌어 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의 주장으로부터 객관적 진리 또는 상대가 인정한 진리와 부합하지 않는 결론이 도출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간접반박으로 간주되며,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을 근거로 가정함으로써 상대를 기만하는 기술을 사용한 예가 된다.
28. 근거가 되지 않는 답변마저도 결론의 근거로 삼는다.
이것은 철면피처럼 뻔뻔스럽게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이다. 우선 상대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 다음, 우리가 의도하는 결론에 유리한 답변을 얻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답변을 근거로 해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내려 버린다.
물론 우리의 결론이 그의 답변으로부터 유추될 수 없는데도, 우리는 그의 답변을 통해 그것이 증명된 것처럼 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상대가 소심한 성격이거나 머리가 나쁜 사람이고, 우리가 철면피처럼 두꺼운 얼굴을 가지고 있고 목소리도 클 경우, 이 기술은 매우 잘 먹혀 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을 근거로 가정함으로써 상대를 기만하는 기술에 속한다.
29. 개별 사실의 시인을 보편적 진리에 대한 시인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귀납법을 사용하고, 상대가 우리에게 귀납법적 결론 도출을 위해 필요한 낱낱의 개별사실에 대해 시인할 경우, 우리는 그에게 이런 개별사실로부터 추론된 보편적 진리에 대해서도 시인할 것인지 물어 볼 필요가 없다. 단지 우리는 나중에 그와 같은 보편적 진리의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으며 그로부터 이에 대한 시인도 받아 냈다고 설명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 이유는 이쯤 되면, 그도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대해 시인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청중들도 그런 인상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개별 사실에 대해 그 동안 우리가 제기한 많은 질문들을 기억하고, 이 질문들이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30. 몇 가지 전제들에 대한 시인만으로도 얼른 결론을 내린다.
상대에게 우리 주장의 전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것에 대해 상대의 시인을 받아 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물어 볼 것 없이 이 대답을 근거로 해서 곧바로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제들 가운데 아직 한두 가지 전제에 대해서 시인을 못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29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상대가 시인한 것으로 간주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야 한다. 이것도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을 근거로 간주해 상대를 기만하는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4부. 위기에서 탈출하는 기술
31. 반격당한 부분을 세밀하게 구분해 위기를 모면한다.
상대가 반증거리를 제시하며 우리를 궁지로 몰아갈 경우, 우리 주장을 다시 세밀하게 구분해 줌으로써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이 기술은 토론의 쟁점이 이중적인 의미나 이중적인 경우로 해석될 수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다.
32.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재빨리 쟁점을 바꾼다.
상대가 우리 주장을 물리칠 만한 논거를 손에 쥐었다는 낌새를 포착했을 경우, 우리는 상대가 자신의 논쟁을 끝까지 밀고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우리는 적절한 때를 잡아 논쟁을 중단하거나 뛰어넘거나 논의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 여기에 대해서는 34장 기술을 참조하라.
33. 상대방에게 유리한 논거는 순환논법이라고 몰아붙인다.
지금 논쟁 중인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에 대해 상대가 우리에게 시인할 것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순환논법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절해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이나 청중은 지금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주장과, 이것이 거의 비슷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주장을 쉽게 동일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대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논거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
34. 질 것 같으면 진지한 태도로 갑자기 딴소리를 한다.
논쟁 도중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재빨리 화제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즉 그것이 논쟁의 본질적인 사안인 것처럼, 또 상대의 주장에 대한 반증인 것처럼, 느닷없이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전환된 화제가 지금까지 진행된 논쟁 내용과 연관된다면, 화제의 전환은 겸손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겠지만, 전환된 화제가 논쟁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논쟁 상대와 연관될 때 화제의 전환은 매우 뻔뻔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진행 중인 논쟁의 쟁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매우 뻔뻔스럽게 화제의 전환을 시도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해야 한다. "좋아요. 얼마 전에 이런 주장을 하시지 않았나요?" 왜냐하면 화제의 전환은 일정 부분 객관성이 결여된 인신공격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 이에 대해서는 38장 참조할 것.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말싸움을 모두 살펴보면, 우리 인간이 이 기술을 선천적으로 배우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상대방을 인신공격한다면, 상대는 이 인신공격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자를 상대로 또 다른 인신공격을 가한다. 이로 인해 상대는 자기에게 가해진 인신공격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이것을 시인하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카르타고인들이 아니라, 아프리카에 사는 카르타고인들을 공격한 스키피오처럼 화제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전쟁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방향전환은 때때로 유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싸움에서 이것은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대로부터 받은 비난을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청중이 양쪽 논쟁자들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모두 다 알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논쟁에서는 이 화제전환의 기술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35. 반론할 게 없으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다고 말한다.
상대가 제사한 근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방법이 없을 경우, 미묘한 반어법을 이용해 자신이 무식해서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해 버려라. 그럼으로써 우리는 청중에게 상대가 한 말이 모두 허튼 소리라고 中傷謀略할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되고 명성을 누리기 시작할 무렵, 고루한 철학교수들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으로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들을 모두 물리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칸트를 따르는 몇몇 젊은 철학자들은 이 고루한 교수들이 털어놓았던 것처럼 그들이 실제로 칸트 철학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했을 때, 이 교수들은 매우 씁쓸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 기술은 우리가 청중들로부터 상대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존경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설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이를테면 교수 대 학생의 관계 같은 경우다. 원래 이 기술은 2장 권위를 이용하는 기술에 속하며, 합당한 근거 대신에 자신의 권위를 악의적으로 이용한다.
이에 대한 반격은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당신의 탁월한 통찰력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이 제 말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모두 제가 설명을 잘못 드린 탓이겠지요."
이렇게 하면 상대는 이 사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싫든 좋든 이것을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로써 그가 애당초 이것을 실제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로써 상황은 다시 역전된다. 즉 상대가 우리 주장을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매도하려 했지만, 우리는 그가 우리 주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이 기술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사용해야 한다.
36. 이론상으로는 맞지만 실제론 틀린다고 억지를 쓴다.
"그것은 이론상으로는 맞지만, 실제로는 틀립니다." 이와 같은 궤변을 통해 우리는 상대 주장의 근거는 인정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있다. 이것은 '논리적 추론은 당연히 근거로부터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규칙과 모순된다.
이런 우리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론상으로 옳은 것은 실제로도 올바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맞지 않다면, 그 이론의 어딘가에 오류가 있든지, 아니면 무언가가 간과되었거나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론상으로도 틀린 것이다.
37. 불합리한 주장을 증명하기 힘들면 아리송한 명제를 던진다.
우리가 불합리한 주장을 했다가, 이것을 증명할 길이 막연할 때가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상대에게 올바르긴 하지만 한눈에 쉽게 그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주장을 해서, 상대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게끔 선택하게 해야 한다. 이때 물론 우리는 상대의 선택을 근거로 우리 주장을 증명하려는 듯한 인상을 그에게 주어야 한다.
상대가 의심을 품고 그것을 거부할 경우, 우리는 그의 선택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상대가 받아들일 경우, 일단 합리적으로 토론을 진행하면서 계속 상황을 지켜보아야만 한다. 여의치 않을 경우, 28장의 기술을 사용해, 상대의 대답으로부터 우리의 불합리한 주장이 증명되었음을 뻔뻔스럽게 주장할 수도 있다.
이 기술을 위해서는 극도의 뻔뻔스러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경험에서부터 우러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 기술을 잘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38. 인신공격은 최후의 수단이다.
상대가 탁월해 우리가 도무지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인신공격이나 모욕, 그리고 무례한 행동으로 공격을 해야 한다. 인신공격의 핵심은 논쟁의 내용을 떠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논쟁상대와 그의 인격에 대해 공격하는 데 있다. 이것은 논쟁상대와 연관된 논증과 구분해 인신공격을 통한 논증이라고 불린다.
논쟁상대와 연관된 논증이 순수 객관적인 내용, 즉 상대방이 말했거나 시인했던 내용을 근거로 해 출발한다면, 인신공격에서는 이런 객관적인 내용을 완전히 무시한 채 논쟁상대의 인격을 공격의 목표로 삼는다. 즉 논쟁상대에게 악의적인 독설을 퍼부음으로써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거친 말을 사용해 그의 인격을 모욕해야 한다.
이것은 이성적인 능력에 호소하기보다는 육체적인 능력과 야수성에 호소하는 기술이다. 이것은 매우 애호되는 기술인데, 그 이유는 누구나 이 기술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기술이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가 어떤 대응기술로 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기술로 맞서면, 멱살잡기나 결투 아니면 명예훼손으로 인한 소송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상대를 인신공격하지 않으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왜냐하면 논쟁에서 승리하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상대의 부당함, 즉 상대가 잘못 생각하고,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침착하게 보여 주는 것이 거칠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 것보다 훨씬 더 상대를 화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처럼 상대를 화나게 만드는 걸까?
"인간이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신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홉스.
인간에게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으며, 이 허영심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 더 아픈 것은 없다. 바로 여기에서 '명예가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격언이 나왔다. 이런 허영심의 충족은 주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써 성취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주로 智力과 연관해서 생긴다.
문제는 이 智力이 논쟁 시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론에서 진 사람은 비록 그가 부당하게 진 것이 아니라고 해도,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 기술을 꺼내게 된다. ☞ 그래서 지적 솔직함과 재도전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의를 갖춰 정정당당하게 나간다고 해서 이 기술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즉 상대가 인신공격을 하자마자, 우리는 조용히 그것은 토론내용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토론쟁점으로 되돌아와 그의 주장이 부당함을 계속 증명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상대의 모욕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일러주는 방법 뿐이다.
"닥치는 대로 아무하고나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되며, 자신이 잘 알고 있고, 결코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지 않으며,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경우 매우 창피하게 여길 만큼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들하고만 토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권위로 내리누르지 않고, 근거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며, 상대의 합리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 진리를 높이 평가하고 상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근거에 대해서는 기꺼이 받아들이는 公平無私한 사람, 마지막으로 상대의 주장이 진리라는 판단이 서면, 기꺼이 자기 주장의 부당함을 인정하는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사람하고만 토론을 벌여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토피카>.
여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우리와 토론을 벌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100명 중에 1명도 안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된다. 왜냐하면 무식하다는 것은 인간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테르의 말이 일리 있기 때문이다.
"평화가 진리보다 더 값진 것이다." - 볼테르. ☞ 토론에선 승리보다 유익함(성장)의 가치를 더욱 값지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아랍의 속담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 "침묵의 나무에는 평화의 열매가 맺힌다."
물론 논쟁은 두 사람의 머리가 마찰을 빚음으로써 이루어지는 행위로써 상호간에 유용한 측면이 있다.
즉 우리는 논쟁을 통해 자기 생각을 교정할 수도 있고, 새로운 견해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두 사람의 논쟁 당사자들이 전문지식이나 지력에 있어서 비슷한 수준에 있어야 한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전문지식이 없으면, 그는 그 논쟁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논쟁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 지력이 떨어질 경우에는 논쟁으로 인해 유발된 격분이 그를 거짓말과 속임수 또는 야만성으로 유혹하게 될 것이다.
가족,친구끼리 이루어지는 사적인 논쟁과 대학졸업을 위한 구두시험 같은 공적인 논쟁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후자의 경우에는 응답자가 항상 상대방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며, 이 때문에 필요한 경우 심사위원이 그를 도와준다는 것 뿐이다.
또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에 논쟁이 훨씬 더 격식을 갖추어 진행되고, 우리 주장도 논리적 추론이라는 엄격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에필로그 - 논쟁적 討論術이란 무엇인가?
논리학은 사고의 규칙, 즉 이성의 합리적 작용방식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討論術은 논쟁하는 기술로 정의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가정한다면, 논리학은 모든 외적인 강요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게 진리탐구만을 목적으로 한다. 즉 논리학은 우리에게 어떤 외적인 강요 없이 순수한 생각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법칙이나 이성의 합리적 작용방식을 규명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그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진리를 찾기 위해 고독하게 숙고할 때 논리학을 이용한다.
반면 討論術은 두 명의 이성적인 사람들이 똑같은 테마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을 때 일어나는 논쟁, 즉 정신적인 싸움을 주로 다룬다. 이들이 오로지 진리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의견일치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의견일치를 볼 수 없는 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인간들에게서 본질적으로 나타나는 개성(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보이는 의견불일치는 진리를 찾겠다는 순수한 의지 때문이 아니라, 이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외적인 요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자 이성의 합리적인 작용방식에 관한 학문인 논리학은 순전히 진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討論術은 대부분 실제의 논쟁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討論術은 두 명의 이성적인 인간이 동일한 문제를 놓고 함께 생각하는 과정에서 개성의 차이로 인해 진리를 찾는 순수한 사고활동이 겪게 되는 장애들과,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을 순수하고 객관적 진리로 인정받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경험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討論術이 필요한 이유는 두 사람이 동일한 테마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인간의 본성상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내기 위해 우선 자기 생각을 점검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이 상대에게 있다고 전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항상 자신이 옳아야 한다는 생각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존재이다.
討論術은 인간의 이런 특성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하지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이 기술을 論爭的 討論術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기술은 항상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배운 여러 가지 행동방식에 대해 가르쳐 준다.
論爭的 討論術이란 정당한 방법은 물론이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논쟁기술이다. 이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객관적으로 정당한 나의 주장도 우리 편은 물론이고, 심지어 내 자신의 눈에도 옳지 않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 토론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좋은 대안으로 관점을 바꿀 수도 있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내 주장을 반박했는데, 이것이 타당한 반박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내가 이에 대해 다시 반증할 수 있는 증거들이 있을 수 있는데도, 상황은 당연히 그에게 유리하게 역전된다. 즉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주장이 옳지 않은데도, 그는 토론에서 이기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주장의 객관적 진실성과, 논쟁자와 청중들이 인정하는 주장의 타당성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討論術은 물론 후자를 지향한다.
왜 이런 형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타고난 사악함 때문이다. 인간에게 이런 사악함이 없다면, 즉 인간이 근본적으로 정직하다면, 모든 논쟁은 진실을 밝혀 내는 것만을 목적으로 할 것이며, 나와 상대방 중 누구의 견해가 진리에 부합되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이거나 기껏해야 아주 사소한 문제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 되었다.
머리가 좋고 나쁨에 대해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의 타고난 허영심은 우리가 처음 내세운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되고, 상대가 옳은 것으로 증명되는 것을 허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따라서 논쟁과 토론에 임하는 우리들 각자는 오로지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 먼저 심사숙고한 다음, 나중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타고난 허영심에는 대부분 수다스러움과 솔직하지 못함까지 덧붙여져 있다. 그들은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서 말을 하고, 나중에 자기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한다. 애당초 진실된 주장이라고 자칭하며 제시할 때 유일한 동기가 되었던 진리에 대한 관심은 이제 허영심에 굴복하고 만다. 이 때문에 진리도 거짓처럼 보일 수 있게 되었고, 거짓도 진리처럼 보일 수 있게 되었다. ☞ 그러기에 이기기 위한 토론이 아니라 지적 성장을 위한 토론에서는 지적으로 솔직함이 요구된다. 지적 허영심은 진리 또는 더 나은 대안에 양보해야 마땅하다.
이런 솔직하지 못한 태도, 즉 우리 눈에도 분명히 틀리게 보이는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도 나름대로 변명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반증이 우리 주장에 대한 확신을 뒤엎어 버릴 것처럼 보여 곧장 우리 주장의 핵심을 포기했지만, 나중에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을 때도 자주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우리 증명은 틀렸지만, 우리 주장을 뒷받침해줄 올바른 증명은 있을 수 있으며, 다만 우리를 구원해줄 이 논거가 곧바로 우리에게 떠오르지 않았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는 상대의 반증이 아무리 올바르고 근거가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것 역시 겉보기에만 그럴 따름이고, 논쟁을 벌여 나가는 과정에서 이것을 뒤집을 또 다른 논거나 다른 관점에서 우리 주장의 진실성을 증명해줄 논거가 떠오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에 대항해 계속 싸워야 한다는 원칙이 생기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논쟁을 벌일 때 어쩔 수 없이 솔직한 자세로 임하지 않거나 적어도 이런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없게 된다. 이런 형태로 우리의 나쁜 머리와 의지의 불합리함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된다.
이 때문에 논쟁을 벌이는 사람은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위해 싸운다. 이때 그는 자기 가정을 자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입장에선 달리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자신의 주장이 한순간 거짓되거나 의심스럽게 보인다 할지라도, 보통 누구나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한다. 이를 위해 각 개인은 자신만의 고유한 간교함과 비열함이라는 보조수단을 어느 정도씩 다 가지고 있다.
討論術을 순수하게 이론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진리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고, 이것을 단순히 논쟁에서 이기는 기술 정도로 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우리 주장이 그 자체로 정당할 경우,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훨씬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討論術 자체는 모든 유형의 공격에 대해서, 특히 정직하지 않은 공격에 대해서, 자신을 방어하는 기술과 함께 자기모순도 없고, 반증의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은 채 상대방의 주장을 공격하는 기술도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선 객관적 진리를 순수하게 발견하는 것과, 자신의 주장이 진리로 간주될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을 구분해야만 한다.
전자는 학술논문 한 편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고, 판단력과 깊은 생각 그리고 경험이 필요한 작업이며, 이를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후자에서는 토론하는 기술이 목적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허구의 논리학이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討論術은 거짓 주장들을 방어하는 데에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장이 옳을 때에도 이것을 방어하기 위해 討論術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잔꾀에 맞서기 위해서, 상대가 어떤 거짓된 잔머리를 돌리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즉 상대가 쓰는 것과 동일한 무기로 상대를 무찌르기 위해 우리는 이런 잔꾀를 자주 사용해야만 한다.
이 때문에 討論術에서는 객관적 진리를 잠시 옆으로 제쳐 두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즉 討論術에서는 자기 주장을 방어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뒤엎어 버리는 것만이 중요하다.
討論術의 규칙에 있어서 우리가 객관적 진리를 고려해야 할 의무는 없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 이런 진리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자기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 자기 자신도 모를 때가 종종 있기 마련이다.
또한 자신이 옳다고 믿다가도, 그 확신이 헛갈리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며, 어떤 경우에는 양쪽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경우도 많이 있다. 왜냐하면 '진리는 깊은 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논쟁이 붙기 시작할 즈음에는 보통 양쪽 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논쟁이 진행되면서 양쪽 모두 이런 확신을 의심하게 되며, 이 논쟁이 끝나 봐야 비로소 누가 진리를 주장했는지 결정 난다.
그러므로 討論術은 진리를 찾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은 검객이 결투를 초래한 언쟁에서 누가 옳은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칼로 상대를 찌르고, 상대의 칼을 방어하는 것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이것은 討論術에서도 마찬가지다.
討論術은 정신이라는 칼을 들고 하는 검술이다. 이렇게 순수하게 파악해야 討論術은 독자적인 분야로 정립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순수 객관적 진리를 목표로 삼는다면, 단순히 논리학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단지 거짓된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궤변술만을 익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경우에는 무엇이 객관적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것을 사전에 미리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討論術의 진정한 개념은 논쟁에서 이기는 정신적 검술이다. 論爭術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지만, 가장 정확한 명칭은 아마 論爭的 老論術이 될 것이다. 이 討論術은 실전에서 매우 유용한 것이며, 이것을 경시 하는 풍조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討論術은 논쟁에서 진실이 자기 쪽에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기술들을 체계와 규칙이라는 형식을 갖추어 요약,설명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학술적인 토론에서와 같이 객관적 진리와 이를 해명하는 데 관심을 두려고 한다면, 그것은 討論術의 원래 목적에서 크게 어긋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원래 의미의 討論術에서는 일어날 수 없으며, 討論術의 원래 목적은 논쟁에서 이기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論爭的 討論術은 논쟁에서 볼 수 있는 솔직하지 못한 잔꾀를 올려 놓고 분석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한다. 여기서 나온 연구결과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실제 논쟁에서 이런 부정직한 잔꾀를 금방 알아차리고, 이것을 물리치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論爭的 討論術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토론에서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자백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내용의 지침서는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討論術은 前人未踏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야 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언쟁에서 이러저러한 기술들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러 다른 형태의 기술들을 일반화함으로써 보편적으로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술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 기술들은 우리가 직접 사용해도 되고 상대가 이 기술을 사용할 때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데 매우 유용하게 이용될 것이다. 38가지 토론의 기술들은 이를 위한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